산서현 이름의 유래

산서현 이름의 유래

태원


태원 즉 대평원(고대시기에 “대”와 “태”는 통용되였다)을 말한다.《시경》,《상서》,《좌전》 등 전적중에 “험윤을 토벌하기 위하여 대원까지 이르렀다”, “분하와 조수의 물길을 트게 하여  큰 호수를 가로막아 대원을 만들었다 ”고 하였는데 이 가운데 있는 대원도 마찬가지 뜻이다. “태원”이 지명으로서 불리우게 된 것은 춘추시대이후부터였다.전국시기에 태원은 조나라의 땅으로 도읍은 진양이였다.진나라 장양왕2년(기원전248년)에 진나라는 “몽오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태원으로 정했다”.이듬해 “처음으로 태원군을 설치하였다”.지방관청은 진양에 있었는데 태원군의 시작이다.송,금,원,청시기에 “태원”은 광의로 태원부를 가리키고 협의로 당명진의 기초에서 발전해 나온 태원성을 가리킨다.민국16년(1927년)에 태원시를 설립하였고 현재 6개 구 1개 시 3개 현을 관할한다.

 


 

 

소점구


소점촌으로부터 이름을 얻었다.촌락은 북송초년에 형성되였는데 송나라가 진양성을 훼손한 후 이곳은 새로 세운 평진현성으로 되였고 서쪽으로 진양고성으로 통하는 분하나루터의 요지로 되였다.처음에는 작은 여관들이 있었지만 후에는 장사치들이 모이는 집성촌으로 되였다.가게가 작고 많았기에 소점이라고 불렀다.명나라 가정년대의 《태원현지》에 “소점보는 원래 영안보였는데 사방으로 통하는 길로 되였다”고 기재되였다.1954년 태원시제4구를 소점구로 고치고 구정부는 소점촌에  설치하였다.1970년에 태원시교외구역은 남과 북쪽 교외구역으로 나뉘였는데 남쪽교외구역정부는 소점진에 설치하였다.1997년 태원시는 작은구역 행정구획을 실시하였는데 원래의 남쪽교외구역을 소점구로 바꾸었다.
 

영택구
 

영택문에서 따온 이름이다.명나라 홍무년간에 태원성을 확대건축하였는데 영택문(대남문이라고도 부른다)은 8대성문중의 하나이다.태원이 해방된 후 대남문밖에 영택거리,영택공원,영택호텔 등을 새롭게 건축하였다.1997년 태원시는 관할구 행정구획을 실시하였는데 “영택”에서 이름을 따서 원래의 남성구를 영택구로 고쳤다.


행화령구


명진왕부의 화원에서 따온 이름이다.명나라 홍무년간에 이곳은 진왕부의 화원이였다.살구나무를 많이 심었고 지세가 비교적 높았으므로 “행화령”이라고 불렀다.태원이 해방된 후 경내에 행화령거리를 세우고 행화령사무소 등을 설치하였다.1997년에 태원시는 관할구역 행정구획을 실시하였는데 “행화령”에서 딴 이름으로 원래의 북성구를 행화령구로 고쳤


첨초평구
 

훨씬 먼 예전에 이 지구에 일종의 뾰족하고 가시가 있는 화초가 대량으로 자라고 있다고 하여 첨초평이라고 불리웠다.태원이 해방된 후 경내에는 첨초평거리,첨초평입체다리,첨초평사무소 등을 설치하였다. “첨초평”이라는 단어는 이미 원래의 범위를 벗어나 태강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지구를 다 가리키게 되였다.1997년에 태원시는 관할구역 행정구획을 실시하였는데 “첨초평”이라는 이름으로 원래의 북교구를 첨초평구로 고쳤다.


만백림구
 

측백나무수림으로부터 얻어진 이름이다.태원이 해방되기 전에 당지의 주민들은 대량으로 측백나무를 심었는데 그 수량이 너무도 많아 “만백림”이라고 부르게 되였다.1954년에 태원시제5구역을 만백림구라고 고쳐 불렀다.1997년에 태원시는 관할구역 행정구획을 실시하였는데 “만백림”의 이름으로 원래의 하서구를 만백림구로 고쳤다.
 

진원구
 

진수로 부터 얻어진 이름이다.위치가 진수의 발원지끝에 있다고 하여 진원이라고 불렀다.옛날 기재된 바에 의하면 “섭부가 진수옆으로 옮겼다”라고 하였다.당나라는 진으로 고쳐 불렀는데 이는 당진이 처음 시작되였음을 알린다.1947년에 진원현을 설립하였고 1954년에 태원시제6구를 진원구라고 고쳐 불렀다.1997년에 태원시는 관할구역 행정구획을 실시 하였는데 “진원”의 이름으로 진원구를 설립하였다.
 

고교시
 

원래는 교성이라고 불리웠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이곳에 교성현을 세웠다.당나라 무후천수2년(691)년에 현소재지를 산남각파촌에 옮기여 점차 고교성이라고 부르게 되였으며 약칭으로 故교라고 하였는데 故와 古의 의미가 동일하여 점차 古교로 되였다.청나라때에는 고교진이였다.1958년에는 고교광공구를 설립하였고 1988년에 다시 고교시로 개편되였다.


청서현


청원현과 서구현 2개 현의 첫글자를 합하여 이루어진 이름이다.청원은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청원수에서 따온 이름이다.민국5년(1916년)에 청원현을 폐지하고 서구현과 합병하여 원래의 현청소재지를 청원진으로 바꾸었다가 이듬해 다시 청원현으로 고쳤다.서구는 금수,상요 2개 강이 합쳐 서서히 흘러 내려오다가 물이 불어나면서  골이 생겨났고 이 옛 골을 경계로 성을 건축하였다고 하여 이름을 서구라고 지었다.금나라 대정29년(1189년)에 다시 서구현을 설립하였다.1952년에 청원현과 서구현은 합병하였고 2개 현의 첫글자를 따서 청서현이라고 이름지었으며 유차전구에 속하게 하였다.1958년에 청서현은 태원시 관할로 되였다.
 

양곡현
 

한나라때 양곡현을 설립하였고 지금의 정양현경내에 있다. 《25사보충편 한서지리지보충지》에는 “응소가 말하기를:천리나 되는 강의 일곡이 있는 현이름에 양이 있는데 그 양을 따서 양곡현이라고 불렀다”수나라 개황6년(586년)에 수문제 양견은 양곡의 “곡”자를 기피하여 양직현이라고 바꾸었다가 그후에 다시 양곡현으로 바꾸게 되였다.송나라 평흥7년(982년)에 양곡현 지방관청은 태원성서곽외로 옮기였으며 금나라 천회년간에는 태원부성내로 옮기였다.그리하여 양곡현은 산서성에서 제일 처음으로 되는 현이며 역사상 “3진수읍”이라고 부른다.
 

누번현


고대의 누번부락으로부터 이름을 짓게 되였다.역사상에는 누번국,누번군,누번감,누번현 등 행정기관을 설립하였지만 관청은 대부분 지금의 경내에 있지 않았다.지금의 누번에 있어서 특정된 지명에 관하여서는 당나라때부터 시작되였다.당나라 용기원년(889년)에 누번현을 설립하였고 후에 폐지하였다가 다시 설립하였다.명나라 초에 현을 폐지하고 진으로 개편되였으며 정락현에 속하였다.1971년에 다시 누번현을 설립하였고 려량지구에 속하게 하였다.1972년에 누번현은 태원시 관할로 되였다.

 

대동시
 

수나라 개황년간에 돌궐의 진공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내몽골오랍특전기에 대동성을 건설하였는데 “천하대동”(사람마다 평등하고 자유롭다)이라는 뜻이다.당나라 말기 사타인이 안으로 이동하여 대동도 따라서 이곳에 설치되였다.이때로부터 대동의 이름은 계속 바뀌지 않고 사용되여 왔다.대동은 역사상에서 줄곧 북방중국의 중심도시로서 “3대수도, 2조요지”였다. (3대수도:북위전기수도,요,금나라 제2의 수도; 2조요지:명나라청나라2개 조대의 요충지) 대동은 자고로 군사요충지와 전략중심지로서 군사가들이 쟁취하려고 하는곳이였다. “동으로는 상곡과 이어졌고 남으로는 평항에 이르렀으며 서로는 황하에까지 범위가 닿았고 북으로는 사막을 공제하였다.실로 수도의 장벽이였으며 중원의 보장이였다.”4개 구 7개현을 관할한다.
 


 

 

대동시성구
 

1949년5월2일,대동은 평화적으로 해방되였고 현을 시로 고쳤다.성구는 시의 일부분으로 성내라고 불렀다.처음에는 4개 구를 설치하였는데 1950년에 3개 구로 바꾸었고 1952년에는 2개 구만 설치하였다.1구는 동북우(구석)와 서북우,북관이였고 2구는 동남우,서남우,남관,동관이였다. 구공소는 구인민정부로 바꾸었고 1954년2월에 성내의 1구와 2구를 합병하여 대동시시내구역을 설립하였으며 동년4월에 대동시도시구역으로 바꾸었다.
 

대동시광구


1950년3월 대동시는 구천광구사무소를 설립하였고 1951년4월에 구천광구인민정부로 개명하였다.1955년에 구천광구는 구천구로 고쳤고 1966년5월에 도시구역,구천구역이 관할하는 농업구역을 떼내여 교외구역을 설립하였으며 구천구는 도시사업의 중심으로 되였다. 1970년10월에는 구천구역에서 나와 대동시광구를 설립하였다.
 

남교외구역
 

1950년3월 대동시에 구천광구사무소를 설립하였고 1951년4월에 구천광구인민정부로 개명하였으며 1955년 구천광구는 구천구역으로 바뀌였다.1966년5월에 도시구역,구천구역이 관할하는 농천구역을 떼내여 교외구역을 설립하였으며 1970년10월에 교외구역을 취소하고 정식으로 남교외구역을 설립하였다. 
 

신영구
 

건국초기 이구역은 대동시와 좌운현에 나뉘여 속해 있었는데 차하르성에 귀속되였다.1958년에 곽가요,동승장,파로 3개 향 외 기타 구역은 대동시교외구역으로  구분편입되였다.1960년에는 고성구역에 속하게 되였으며1964년에 대동현관할로 회복되였다.1970년에 지금의 신영촌 서쪽에서 대동시북교외구역을 설립하였고 1972년4월에 소재지 마을이름을 신영구로 개명하였다.
 

대동현


현의 이름은 “대동시”의 이름을 딴것과 마찬가지이다.1949년  5월 대동이 해방되고 동,서 대동현이 합병되였으며 차하르성 안북지구에 속하게 되였다.1952년에는 산서성안북지구에 속하게 되였고 1954년에 회인현과 합병하여 대인현으로 되였다.1958년에는 대동시로 귀속되였고 대교외구역으로 불리웠다.1960년 원대동현을 구분하여 고성구로 하였고 1965년에는 대동현편제를 회복하여 안북전서로 돌아갔다.1993년7월1일 안북지구는 대동시와 합병하여 대도시로 귀속되였다.대동현행정중심은 자고이래 줄곧 시내구역에 있었고 1971년에 서평진으로 옮겼다.
 

양고현


한나라는 고류현을 세웠고 후에 항주고류군이 고류와 안양 2개현을 거느리게 되였다.명나라 홍무26년(1393년)에 양과 위를 세웠다.31년(1398년)에 지금 이곳에 성을 쌓았는데 성이 양하강반에 있다고 하여 비슷한 이름을 따서 양화성이라고 불렀다.선덕원년(1426년)에 고산위로 옮기고 동치시대에 또 양하통판을 세웠다.청나라 순치3년(1646년)에 양하와 고산을 합쳐 양고위로 하였고 옹정3년(1725년)에 위를 현으로 개편하였으며 이로부터 양고현이라는 이름이 있기 시작하였다.


천진현


전국시대에 조나라의 능읍까지 늘어났으며 당나라는 천성군을 설치하였고 요와 금, 원나라도 잇달아 천성현이라고 하였다.명나라초(1368년)에 천성위라고 바꾸었다.홍희원년(1425년)에 진로위를 동시에 세웠으며 청나라 순치3년(1646년)에 천성,진로 2개 위를 천진위로 합병하였다.옹정3년(1725년)에 천진현으로 개편하였다.
 

혼원현
 

서한때 곽현과 평서 2개 현을 세우고 안문군과 대군에 갈라 속해있었으며 2개 현을 합병하여 곽현이라 부르고 항산군에 속하게 하였다.동한건무년간에 곽현을 취소하고 당산관(당산은 지금의 항산.문제 유항의 이름을 피하여 개명한것이다.)을 세웠다.삼국시기에 조위는 곽현을 다시 회복하였고 북위는 관산현이라고 하였으며 사주에 예속되였고 수도부근의 땅이였다.당나라 초에 운주속지로 되였고 후에 혼원현으로 불리웠는데 혼하의 발원지라는것으로부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영구현
 

영구의 이름은 전국시대에 이미 나왔다.조나라 무령왕이 죽은후 이곳에 묻었다고 하여 이름을 얻게 되였다.한고조11년(기원전196년)에 영구현을 설치하고 유주대군에 속하게 하였다.동한때에는 중산국에 속하였다가 후에 폐지되였고 북위때 다시 영구군을 회복하고 사주에 속하게 하였다.
 

광령현


전국시대에 평서읍이라고 불리웠으며 조나라에 속하였다.진나라때는 대군에 속하였고 서한년간에 평서현을 세웠으며 유주대군에 예속되였다.요나라 통화13년(995년)에 광령현을 세웠는데 현서쪽 15킬로미터 되는 곳에 광령천이 있다고 하여 이름짓게 된 것이다.
 

좌운현
 

명나라 홍무26년(1393년)에 진삭위를 세웠고 영락7년(1409년)에 좌위로 개명하였다.정통14년(1449년)에 장성밖의 운천위와 합병하여 좌운천위라고 불렀다.청나라 옹정3년(1725년)에 위를 취소하고 현을 설치하였으며 좌운현이라고 불렀다.

 

삭주시
 

“삭”은 지명으로서 땅의 북단을 가리키고 나라의 변계를 가리키며 두나라의 접경지대를 말한다.북제천보6년에 마읍의 서남쪽 47킬로미터인곳에 새로운 성 삭주를 세웠다.8년에는 마읍고성으로 옮겼는데 바로 지금의 삭주성이다.그후부터 몇천년의 역사가 흘렀지만 삭주의 지명과 땅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고정되여 있었다.1989년에 삭주시를 설립하였고 현재 2개 구 와 4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삭성구


“삭”의 의미는 “삭주”의 삭과 같다.요황제시기에 기주지역이였고 순황제시기에는 병주에 속하였다.하나라때에는 훈육(薰鬻)에 속하였고 상나라때는 토방에 속하였다.서주때에는 북융에 속하였고 춘추시대에는 북적이 점거하였다.전국시기에는 조나라관할이였고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에는 이곳에 마읍현을 만들었다.북제시기에 삭주를 설립하였는데 명나라 청나라까지 연속되였으며 민국초에 삭현을 설립하였다.삭주시가 1989년에 성립된 후 삭현은 삭성구로 이름을 바꾸게 되였다.
 

평로구
 

명나라때 평로위를 세웠고 청나라때는 평로현이라고 하였다.1958년에 평로와 삭현이 합병되여 삭현이라 불리웠고 1961년에 평로현이 회복되였다.1989년에 평로현을 취소하여 평로구로 개편하였다.
 

산음현
 

춘추시대에 대국의 땅이였다.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고 진나라때에는 안문군에 속하였다.수나라때에는 신무현의 땅이였고 마읍군에 속하였다.당나라시기에는 마읍현의 땅이였고 삭주에 속하였다.요나라는 하음현을 설립하였고 금나라 대정7년(1167년)에 산음현으로 개명하였는데 항산의 갈래인 취미산의 음달진 언덕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이름을 얻게 되였다.

 

회인현


춘추시기에는 대에 속하였고 전국시기에는 조나라에 속하였으며 진한때에는 안문군에 속하였다.수나라때에는 운내현의 땅이였고 당나라때에는 운중현의 땅이였다.요나라는 회인현을 세웠고 후에 당나라 무황 이극용과 요나라 태조 야율 아보기가 운주의 동성에서 동맹을 맺어 “회상인인”이라는 뜻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응현


당나라때에는 마읍현의 땅이였고 당나라 말기에 응주를 세웠다.민국원년에 응현이라고 고쳤는데 경내에 용수,안문 두개 산이 남북으로 상응하고 있는사이에 성이 있다고 하여 지은 것이다.


우옥현


명나라 홍무25년(1392년)에 정변위를 세우고 영락7년(1409년)에 대동우위를 다시 설립하였다.정통년간에 변외 옥림위를 우위에 합병시키고 우옥림위라고 불렀으며 청나라 초에 우옥위라고 불렀다.옹정3년(1725년)에는 우옥현으로 개편되였다.

 

흔주시
 

옛적에는 수용이라고 불렀으며 춘추시기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다.진나라는 구주산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안문군에 속하고 남쪽은 태원군에 속하였다.동한말년에 신흥군을 설립하였고 서진은 신흥군을 금창군으로 고쳤다.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군을 폐지하고 주를 설치하였는데 처음으로 흔주라고 불리웠고  “흔구가 있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전해지는 다른 설로는 한고조가 북상하여 흉노와 대항하여 싸울때 병사가 평성(지금의 대동)에 갇히게 되였다.포위를 뚫고 나올때 대군이 남쪽으로 철퇴하여 흔구에서 곤경에서 벗어났다고 한다.고조는 너무 기뻐 즐겁게 웃었고 6군은 흔연히 돌아왔다고 한다.여기에서 “기뻐할 欣”이 “흔(忻)”과 통하기에 흔주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1949년 경내를 흔현지구전서로 하였고 1983년에는 흔주지구행서라고 고치였으며 2001년에는 흔주시라고 개편하였다.현재 1개 구 1개 시 12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흔부구


“흔”의 뜻은 “흔주”와 마찬가지이다.민국초에 흔현이라고 바뀌였고 1983년에 흔주시로 되였으며 2001년에 흔부구로 부르게 되였다.
 

정양현


“사기정의”에 기재된데 의하면 고대시법에 따라 “벽지위양”, “벽지유덕,양”이라고 한다.서한은 정양군을 설립하였고 군소재지는 지금의 내몽골허린거얼(몽골언어)북쪽에 있었다.허린거얼 일대를 정양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새제도를 실시하는 이 지구가 안정되였다는 표시였다.후한말기에 내몽골에서 금치로 옮겼고 당나라 무덕4년(621년)에 금치에서 정양현을 설립하였다.
 

오대현
 

북위태화10년(486년)에 려이현을 설립하였고 수나라 대업2년(606년)에 경내에 오대산이 있다고 하여 오대현으로 개명하였다.금나라 정우4년(1216년)에 태주로 승격하였고 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오대현으로 회복되였다.
 

원평시


지형이 평원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서한원정3년(기원전114년)에 처음으로 원평현을 설립하였고 수나라 대업2년(606년)에 곽현이라고 불렀다.당나라 신룡원년(705년)에 당림현이라고 불리웠고 1958년에 원평현으로 개명하였다.1933년에는 현을 폐지하고 시를 건립하였다.
 

대현


대현의 “대”는 대국,대군의 지명으로부터 온 것이다.고대국,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는데 조나라 무영왕이 대군을 설립하였고 진조때에는 36군중의 하나였으며 소재지는 지금의 대현이였다.한고조6년(기원전201년)에 유방은 운중,안문, 대군 중의 53개 현을 합병하여 대국을 만들었다.한대이후 대국과 대지의 이름은 경상적으로 사용되였는데 구역범위는 부단히 변화하였다.현재의 대현은 하나의 오래된 지명의 중요한 견증이다.
 

번치현


춘추시기에는 진나라에 속하였고 곽인읍이였다.전국시기에는 조나라에 귀속되였고 진나라가 6국을 멸한 후 처음으로 번치(畤)현을 설립하였다.주위에 뭇산들이 둘러싸여 있어 얻은 이름이다.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주를 폐지하고 현을 세웠으며 번치(畤)를 번치(峙)로 고쳤다.
 

정락현
 

서한초년에 분양현을 설립하였고 수나라 대업4년(608년)에 정락현으로 고쳤는데 “정화이락”의 뜻에서 지은 것이다.당나라 무덕6년(623년)에 분양,6도2현을 정락현에 합병하였다.송나라 함평5년(1002년)헌주치를 우번에서 정락으로 옮기였고 정락현을 폐지하고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희녕3년(1070년)애 헌주를 다시 설립하고 정락현을 거느리게 하였다.금나때에는 정락군을 설립하였고 천덕3년(1151년)에 관주라고 고쳤다.원나라는 금나라 제도를 계승하여 관주라 하였고 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다시 정락현으로 고쳤다.
 

녕무현


원나라 대덕5년(1301년)에 녕무둔을 건립하였고“함녕언무”의 연고로 이름 지었다.명나라 성화4년(1468년)에 녕무관을 설립하였고 옹정3년(1725년)에 녕무현을 설립하였는데 현이름을 관명에서 지은 것이다.

 

신지현
 

신지는 북쪽 황화령에서 시작되여 첩첩이 이어진 산봉우리와 구불구불한 고개에서 내려와 약 30리 흘러내린다.땅은 적고 평평한데 한갈래 물이 흐르고 온곳을 알 수 없고 가는 곳을 모른다.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하고 침수해도 넘치지 아니한다.그리하여 이름을 신지라고 하였다.또 다른 설로는 예전에 한 여자가 결혼하지 않았는데 쌍룡을 낳아 룡자가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갔다고 한다.룡모는 보이지 않고 양수만이 점점 불어나 서해자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지의 유래라고 한다.


오채현
 

명나라 가경16년(1537년)에 오채성보를 건립하였는데 성보가 관할하는 동서남북중에서 오대보채로부터 이름지었다고 한다.청나라 옹정3년(1725년)에 오채현을 설립하였다.
 

가람현
 

북위때에 수용군의 땅이였는데 경내에 가람산이 있는것으로부터 람주라는 이름을 얻게 되였다.수나라 대업3년(607년)에 가람진을 세우고 당나라 영순2년(683년)에 가람주로 바꾸었다.장안3년(703년)에 람곡현을 세우고 람주에 속하게 하였다.5대시기에는 습전제에 근거하여 의연히 람곡현이라고 하였다.송나라는 람곡현을 가람군에 세웠고 금나라때에는 군을 폐지하여 람곡현을 가람주로 승격되게 하였으며 원나라때에 폐지되였다.명나라 홍무8년(1375년)에 가람현을 가람주로 회복시켰고 민국원년에 가람현으로 다시 부르게 되였다.
 

하곡현
 

땅이 황하곡절이 있는 곳이라고 하여 “황하천리일곡”의 뜻으로 이름을 얻었다.전국시기에 조나라에 속하였고 한나라때는 서하군선무현의 땅이였다.서진때에는 강호에 속하였고 당나라때는 이방현의 땅이였다.5대북한시기에는 웅영진을 세웠고 람주에 속하였다.송나라 태평흥국7년(982년)에는 화산군을 건립하였고 치평4년(1067년)에 화산현을 세웠는데 대주에 속하였다.금나라 정원원년(1153년)에는 하곡현을 세웠고 대정22년(1182년)에 화산주로 승격되였으며 후에 오주로 개명하였다.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하곡현을 다시 세웠고 태원부에 예속되게 하였으며 옹정2년(1724년)에는 보득주에 속하게 하였다.
 

보득현


송순화4년에 정강군을 세웠고 경덕원년에 보덕군으로 고쳤으며 “민보우성,성보우덕”의 뜻에서 따 왔다.금나라 대정11년(1171년)에 보덕현을 설립하였다.


편관현
 

오대북한시기 천회원년에 한광령에서 시작하여 채를 쌓기 시작하였는데 그 땅이 동은 쳐들고 서는 엎드린것이 사람의 머리처럼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하여 편두채라고 불렀다.원나라 대덕3년(1299년)에 채를 관으로 승격하였고 옹정3년(1725년)에는 편관현을 설립하였다.

 

양천시
 

양천시지명의 형성은 이곳 특유의 “양천”자연현상 및 그 자연환경과 연관이 있다.제일 처음에는 마을이름이였다가 후에 역전이름,진이름으로 되였으며 1947년에5월에 시이름으로 되였다.청나라 광서판《평정주지》에 기재되기를 주의 서쪽으로 15리 되는곳에 샘물이 5개 있었는데 모두 평지에서 솟아올라와 양천이라고 불렀으며 잘못 전해져 양운이라고 하였다.양천촌이 설립된것은 북송시기보다 늦지 않다고 하며 마을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한개 마을이 “대양천”, “소양천” 2개 촌으로 변하였다.청나라 광서32년(1906년)에 정태철도가 소양천마을로 통하게 되였고 그곳에 역전을 세우게 되였는데 이름을 “양천역”이라고 하였으며 역전을 중심으로 점점 공상,군사요충지인 “양천진”으로 되였다.1947년5월에 양천시는 정식으로 건립되였고 중국공산당에 의해 세워진 제일 첫도시이며 현재 3개 구 2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양천시시내구역


1952년에 제1구를 설립하였고 1956년에 참상구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양천시기차역으로부터 이름을 따온 것이다.1957년에 음영구와 합병되여 교외구역으로 되였으며 1958년에 참상공사로 개편되였다.1963년에 참상구로 다시 고치고 1969년에는 시내구역으로 고쳤다.
 

양천시광구


1980년에 과거의 양천광무국정기합일기구를 행정기구로 바꾸었고 광구로 되였다.
 

양천시교외구역


1952년에 제2구를 설립하였고 1956년에 음영구로 바뀌였다.1957년에 참상구와 합병하여 교외구역으로 되였다가 1958년에 평정현의 교외구역과 합병되여 양천시교외구역으로 불리웠다.1961년에 양천시교외구역을 폐지하고 시에서 인민공사를 설립하였다.1963년에 음영구를 회복하였고 1969년에 양천구교외구역으로 고쳐 불렀다.
 

평정현


서한때 상애현이 설립되였고 북위시대에는 석애현이라고 불렀다.당나라 천보원년(724년)에 광양현이라고 개명하였고 송나라 태평흥국2년(977년)에 평정군을 이곳에 설립하였으며 4년에는 광양현을 평정현으로 고쳤다.청나라 광서판《평정주지》에 기재한 바에 의하면 “송태조는 정벌하러 하동끝까지 내려갔으며 그곳에 평정군을 세우고 진주에 속하게 하였다”. “평정”이라는 이름은 “사방이 태평해야 나라 백성도 안정된다”는 뜻이 있다.(《시경•대아•강한》을 참고)


우현
 

춘추시기에 백적인들이 수유국을 건립하였는데 전국초기에 진나라 지백(순요)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였고 그자리에 원수성을 설립하였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원수현을 설립하였고 수나라 대업2년(606년)에 우현이라고 개명하였다.현성의 4주위가 높고 중간이 낮으며 모양이 바리같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명나라시기 산서제학 심종은《제우성》이라는 시에서 “3리고성4면산”으로 우성의 지형을 묘사하였다.

 

진중시


1949년8월 유차전구를 설치하였는데 산서중부에 있다고 하여 1958년11월에 진중전구로 바꾸어 불렀고 1968년9월부터 진중지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1999년9월에 지급시로 개편하였는데 1개 구 1개 시 9개 현을 관할한다.
 


 

 

유차구
 

천추시기에 염황제8세 유망의 영지에 유주국을 세웠는데 후손들은 염제유망을 기념하기 위하여 원래의 유주국의 중심지대를 유사라고 불렀다.즉 유망황제의 나라라는 뜻이며 변강지대는 유차라고 불렀다.북위,북제시대에 두번이나 중도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공원979년에 송태종은 북한을 멸망시키고 진양을 훼멸한다음 주를 유차와 합병하였다.월나라3년에 당명진으로 다시 옮기며 유차도 현편제를 회복하였다.이후 역대 현이름은 바뀌지 않았다.1958년 현급유차시를 세우고 1999년에 유차구로 개편하였다.
 

태곡현
 

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주양왕시기에 진후는 이곳을 대부(고대관직) 양처부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였으므로 양읍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였다.서한시기에 양읍현을 세우고 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태곡산곡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현이름을 태곡이라고 하였다.
 

기현
 

기현은 “소여기택수”(잡초가 자란 늪지대)로부터 이름을 지었다.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진공2년에 기의 땅을 대부 기해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였다.전국시대에 기의 땅은 조나라에 속하였고 서한시기에 기현을 설치하였다.신망시대에 기현은 한때 시현으로 개명되였다가 동한때 다시 기현이라는 이름을 회복하였다.북제 천보7년에 기현을 폐지하였는데 수나라 개황10년에 다시 기현을 설치하고 병주에 속하게 하였다.당나라 무덕3년에 태곡현을 태주에 세우고 기현을 태주에 속하게 하였다.6년에는 태주를 폐지하였지만 여전히 병주에 속했다.송나라때에는 태원부에 속하였고 금나라때에 다시 기현이라고 부르며 병주에 속하게 하였다.원나라때에도 기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태원로에 속하였다.
 

평요현
 

춘추시기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다.한나라때 평요는 경릉,중도 2개 현 및 오현의 땅이였다.서한시기에 평요현을 세우고 북위태무제때에 중도현을 유차로 옮기고 평요현의 명목으로 통치하였다.관청은 경능촌으로 옮기고 태무제의 존명인 탁발도를 피하기 위해 평도를 평요로 고치고 동시에 경능현을 폐지하고 평요현에 편입시켰다.이때로부터 평요현이름은 줄곧 사용되였다.수나라 개황16년에 청세현을 분할하여 세웠는데 대업초년에 폐지하였고 역대로 평요현은 기본상 분주관할하에 있었다.
 

개휴시
 

기원전636년에 진문공은 돌아와서 수행대신들에게 상을 내렸다.개자는 봉록을 요구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면산에 은거하였다.진문공은 숲에 불을 질러 개자추를 불러 내리려 하였지만 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나무를 부둥켜안고 죽었다.개휴 즉 개자추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기원전514년부터 개휴역사상 선후하여 동부에 오현을 설치하였고 서부에 평주읍을 설치하였다.진시황은 군현을 설치하고 시내구역에 계휴를 설치하였는데 후에 계미,개휴,평창으로 바뀌였다.북주시기에 개휴군을 설치하였고 수나라 당나라 시기 한때 개휴군,개주를 설립하였다.
 

영석현
 

수나라 개황10년에 문제 양견은 북방순찰을 하면서 분하를 파서 길을 만들다가 하나의 큰 돌을 발견하였다.철같기도 하고 돌같기도 하며 색갈이 푸르고 소리가 쟁쟁한것이 영험하고 상서롭다고 하여 명령을 내려 “영석”이라고 이름지었으며 평창현서남땅을 떼어내여 영석현이라고 하였다.
 

유사현
 

춘추시기에 염제8세 유망의 영지에 유주국을 건립하였는데 후손들은 염제유망을 기념하기 위하여 원래의 유주국의 중심지대를 유사라고 불렀다. 이것은 유망황제의 나라라는 뜻으로 변경지대는 유차라고 하였다.남조시기에 기자의 자작국이였고 국명은 “기”였다.주조시기에는 병주에 속하였고 춘추시대에는 진나라에 속하였다. 전국시대에는 먼저 한나라에 속하였다가 후에 조나라에 속하게 되였으며 진나라때에는 상당구에 속하였다. 한나라때에는 날씨현을 세우고 진나라는 날씨현을 분할하여 무향현을 설치하였으며 유사가 거기에 속하였다.수나라 개황16년에 무향현을 분할하여 유사현을 세웠다.
 

좌권현
 

춘추시대에는 진나라에 속하였는데 전국시대에는 먼저 한나라에 속했다가 후에 조나라에 속하게 되였다.진나라때에는 상당군에 속하였고 서한시기에는 날씨현에 속하였다.동한말년에는 노하수(청장하서원)가 흐른다고 하여 처음으로 노하현을 세워 상당군에 속하게 되였다.서진시기에는 노양현으로 이름이 바뀌고 낙평군에 속하였다.북위태평진군9년(448년)에는 현향이 편입되였고 효창2년(526년)에 다시 현을 설치하고 요양이라고 개명하였다.북제시기에는 양유현(지금의 화순현)에 편입되였고 수나라 개황10년(590년)에 현서북에 있는 요산을 따서 요산현으로 바꾸었다.1942년9월18일 요현 마전에서 장렬히 희생된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장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요현을 좌권현이라고 개명하였다.
 

화순현
 

북제시기에 양유현을 세웠는데 경내에 양수하가 흐른다고 하여 지어진 것이다.수나라 개황10년(590년)에 화순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현성 동북에 화순의 고성이 있다고 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화순”이라는 뜻은 석륵과 이양이 구마지를 쟁탈하다가 후에 화해한 이석이야기로 부터 온 것이다.석륵은 황제로 된 후 민심을 얻기 위하여 인재를 중시하면서 특히 고향의 친지들과 친구들을 양국으로 청하였는데 여러번이나 겨루었던 이양이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이양은 장사로구나,어찌하여 오지 않았는가?구마는 평민때의 원한이고 나는 앞으로 인재를 모아야 하는데 어찌 아직도 평민백성을 원수로 보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이양은 이말을 듣고 인차 와서 용서를 빌었더니 석륵은 웃으면서 “전에는 경의 주먹을 싫어하였지만 경 역시 나의 독한 손맛을 봤었지”라고 말했다.후에 이양에게 주택을 하사하고 종군도위로 섬기게 하였다. “화순”이라는 이 이름은 석륵이 나라를 다스리는 계획과 책략에 있어서 적극적인 평가를 받았다.
 

석양현
 

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는데 서한때 점현을 세웠고 금나라 대정2년(1162년)에 평정주를 설립하였다.1914년에는 석양현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원화군현지”에는 “석양고성 일명 석양성”이라고 기재되였다. “이아”의 기재에는 “산서는 서양이고 산동은 조양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석양”은 태행산서쪽에 있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수양현
 

서진태강년간에 수양을 세웠는데 땅이 “장수지양”에 있다고 하여 지어진 것이며 낙평군에 속하였다.북위 태평진군9년(448년)에 수양은 대릉성(지금의 문수현)에 옮기였고 수(受)현이라고 개명하였다.수나라 개황10년(590년)에 수양고성은 다시 수양현을 설치하고 병주에 속하게 하였다.당나라 무덕6년(623년)에 수주에 현성을 설치하고 수양현이 속하게 하였다.정관8년(634년)에 수(受)주를 폐지하고 여전히 병주에 속해 있었으며 정관11년(637년)에 수(受)양을 수(壽)양으로 고쳤다.

 

려량시
 

려량은 려량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전경내를 관통한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것이다.시구역안의 골척산은 옛날에 려량산이라고 불렀다.만력 《분주부지》의 기재에 의하면 “려량산,일명 골척산,……태산은 왼쪽,화산은 오른쪽,상산에 기대고 고산에 안겨 형산을 마주하고 있다.이산은 궁륭이 중간에 있고 천지의 골척… … ”이라고 씌여져 있다.골척의 옛날 뜻은 려량과 동일하기에 려량산은 여기에서 따다 지은 이름이다.현재 1개 구 2개 시 10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교성현
 

서주때 북당에 속하였고 호씨융지였다.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서북산구는 호씨의 식읍이였다.동남평천은 기씨의 밭이였고 진경공12년(기원전514년)에 평릉현을 경내 대릉촌일대에 설치하였으며 평릉에 속하게 하였다.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으며 서부의 땅은 대릉현에,동부의 땅은 진양현에 속하였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진양,문수의 땅을 나누어 교성현을 세웠는데 분하와 공하 두개강이 합치는곳에 있다고 하여 이름지어졌다.당나라 무후천수2년(691년)에 현을 산남각파촌으로 옮겨 통치하였다.


문수현


춘추시기에 진국의 기씨밭이였으며 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는 대릉읍이였다.서한 왕망시기에는 대녕현이라고 개명하였는데 동한시대에 와서 대릉현으로 회복하였다. 북위태평진군9년(448년)에 수양현(서수양이라고도 부른다)이라고 고쳤다.수나라 개황10년(590년)에 경내의 문곡수는 물결이 파도쳤는데 여기로부터 문수현이라는 이름을 처음 고치게 되였다.당나라 무측천이 황제일때 그의 고향인 문수현을 무흥현이라고 개명하고 당나라 신룡원년에 다시 문수현으로 회복하였다.

 

분양시


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으며 과연현 땅이였다.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고 자씨땅이였다.삼국시기 위 황초2년(221년)에 자씨현은 서하군 관할로 되였고 군소재지를 자씨고성에 설치하였다.서진시기 서하군을 서하국으로 개편하였고 자씨현을 습성현으로 고쳤으며 북위 태화12년(448년)에 분주를 설립하여 습성현을 관할하게 하였고 당나라 상원원년(760년)에 습성현을 서하현으로 고치였다.당나라 말기,오대,송,금,원,명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명나라 만력23년(1595년)에 분양현을 설치하였다.분양현경계가 분하지양(서)에 이르렀고 송나라 금나라 2나라가 모두 서하현에서 분양군으로 주둔하였던 것에 근거하여 이름을 지었다.1996년8월에 분양시로 개편되였다.


효의시
 

전국시대 위나라에 속하였고 진나라 시기에는 태원군에 속하였으며 자씨현의 땅이였다. 삼국시기 위초원년에 중양현으로 옮겼고 병주서하군에 속하였다.서진시기 영가원년에는 병주서하군습하현에 속하게 되였고 북위때에는 영안현을 설치하였다.당나라 정관원년(627년)에는 현에 있는 효자 정흥이라는 사람이 “할고봉모”(자신의 살점을 베어내여 어머니에게 드린)효행이 조정과 재야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당태종은 조서를 내려 영안현을 효의현으로 개명하였다.1992년2월 효의시로 개편되였다.
 

교구현
 

교구현은 1971년4월에 건립되였는데 습현에서 교구,석구,천구,강성과 영석현에서 회룡,쌍지 그리고 효의현에서 대맥교,단소,온천 등 9개공사를 떼어내여 이루어 졌다.현소재지가 교구진에 있기에 양산남북교통의 길목이라는 뜻으로 교구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석루현
 

은상시기에는 지국에 속하였고 춘추시대에는 굴지에 속하였다.서한때에는 토군현을 세웠고 서하군에 속하였으며 동한초에 토군현을 폐지하였다.북위태평진군9년(448년)에 욕서현을 세웠고 토경군이 다스렸다.태화21년(497년)에 토경현으로 개명하였고 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석루현이라고 바꾸었다.현의 동쪽에 통천산(현재의 석루산)이 있었기에 “석접여루”에서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유림현
 

1971년7월 이석현 서부,중양현서부에서 각각 부분적으로 공사를 떼어내여 유림현을 건립하였다.현성이 유림진에 있다고 하여 이름을 짓게 되였으며 버드나무가 숲을 이룬다는 뜻에서 온 것이다.
 

중양현


전국시기에 처음으로 중양읍이라고 불리웠는데 조나라에 속하였다.서한시기에 중양현을 설립하고  “한낮의 태양,여일중천”의 뜻에서 따온 것이다.동한말 이석현과 합병되였고 북주 대상원년(579년)에 녕향과 평이 2개현을 나누어 설치하였으며 이석군에 속하였다. 수나라시기에는 평이현으로 합병하였고 이석군에 속하게 하였다.당나라때에는 석주에 속하였고 송나라때에는 태원군에 속하였다.금나라 태화년간에 녕향현이라고 개명하였으며 1914년에는 중양현으로 되였다.
 

이석구
 

전해지는 바 고대에 운석이 현경내에 떨어졌다고 하여 이석이라고 지었다.또 다른 설에 의하면 현의 동북쪽에 이석수가 있다고 하여 이름지어졌다고 한다.전국시대에는 조나라의 이석읍이였고 서한시기에는 이석현이였다
 

방산현
 

서한시기에 고랑현을 세웠고 북제 문선제시기에 양천현을 세웠다.수나라 대업3년(607년)에 방산진으로 옮겼고 방산현이라고 개명하였는데 성이 방산아래에 있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람현
 

경내에 가람산이 있다고 하여 이름지어졌으며 북위초에는 수용의 땅이였고 말년에는 고환이 수용을 멸하고 그땅에 람주를 설립하였다.수나라는 람성현을 세우고 누번군에 속하게 하였으며 당나라때에는 의방현으로 개명하고 람주에 속하게 하였다.오대,송,금,원나라때는 줄곧 변함없었다.명조홍무2년(1369년)에 람주는 람현 즉 주에서 현으로 되였다.
 

임현
 

하조때 기주에 속하였고 주조때에는 조나라땅에 예속되였다.서한때에는 임수현을 설립하였고 경내에 있는 추수하(옛적에는 능수라고 불렀다)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북주대상원년(579년)에 오돌군과 오돌현을 설립하였고 수나라 개황원년(581년)에 오돌군을 태화군으로 ,오돌현은 태화현으로 고쳤다.개황3년에 군을 폐지하였다.당나라 무덕3년(620년)에 태화현은 임천현으로 개명되였고 금나라 천회원년(1123년)에 임천은 임수로 바뀌였다.원세조지원3년(1266년)에 임주를 설립하였고 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임주를 폐지하고 임현으로 고쳤다.
 

흥현
 

북제 천보원년(550년)에 위분현을 세웠고 후에 임천현,임진현,합하현으로 여러차례 개명되였다가 금나라 흥정2년(1218년)에 진양공 곽문진이 “이곳은 빈하와 잇닿아 땅이 중요하고 백성들이 많아 합하현을 흥주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흥성”의 뜻을 취하여 지었다.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흥주는 흥현으로 개편되였다.

 

장치시
 

옛날 장치시는 상당이라고 불리웠다.그것은 태행산꼭대기와 지형이 최고로 높아 하늘과 친구한다고 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전국시기에 한나라가 처음으로 상당군을 세웠는데 남북조시기에 이르러 노주로 바꾸었다.그후 명나라 가경8년(1529년)에 다시 노안부로 바뀌였고 장치현을 세웠으며 “사회질서가 장기간 안정되고 태평스럽다”는 뜻을 취하여 지어진 것이다.장치현은 현재 2개 구 1개 시 10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장치시시내성구

 

1946년에 장치시를 건립하였고 1950년에 공광구로 개편하였으며 1952년에 재차 장치시로 바꾸었다.1975년 장치시는 성할시로 됨과 동시에 시내와 교외 두 구역을 설립하였다.1976년에 시내구역은 정식으로 현급구로 설립되였다.
 

 

장치시교외구역

 

1946년에 장치시를 건립하였고 1950년에 공광구로 개편하였으며 1952년에 재차 장치시로 바꾸었다.1975년 장치시는 성할시로 됨과 동시에 시내와 교외 두 구역을 설립하였다.1976년에 교외구역은 정식으로 현급구로 설립되였다.


장치현

 

춘추시대에는 적적 노씨의 땅이였는데 진에 속했다.전국시기에는 韓나라의  별도로서 상당군에 속하였고 漢나라시기에는 호관땅이였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호관을 떼어 상당현을 세웠다.명나라 가경8년(1529년)에 노주는 노안부로 승격하였고 부곽으로 장치현을 설립하였는데 “사회질서가 장기간 안정되고 태평스럽다”는 뜻이다.
 

노성시

 

황제시대 염제의 후손인 참노가 지금의 노성일대를 수봉하였고 노국을 건립하였다.상나라 무정황제이후 상왕조는 서북부의 귀방,토방 등 이웃나라와 자주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나라들은 모두 산서남부에 분포되여 있었다.그중 귀방의 한개 갈래가 서락귀융인데 현재의 노성일대에서 활동하였다.선진사 전문가는 “낙(落)”이 곧 “노”라고 하며 潞국의 노의 뜻 유래라고 하였다.상나라는 위자봉지에 속하며 위자국이라고 부르고 서주는 노라고 불렀는데 춘추시대에는 노자영아국이였다.漢나라는 노(潞)현을 설립하였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노성현을설립하였고 당나라 천우2년(905년)에 노자현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5대시기에 다시 노성현이라고 부르게 되였고 1994년에는 현을 취소하고 시로 되였다.


둔류현
 


주조에서 시작되였는데 둔류동부는 류우라고 불리웠고 서부는 서오씨(徐吾氏)의 땅이였다.춘추시대에 류우,서오는 모두 진(晉)나라에 합병되였고 류우는 순류라고도 불리웠다.전국시대에 순류는 다시 둔류로 불리우고 서오는 여오로 바뀌였으며 모두 한나라에 속한다.한나라는 둔류,여오 2개 현을 세웠고 동한때에는 여오를 둔류와 합병하였다.


장자현

 

전해지는데 의하면 고대요황제의 장자인 단주의 봉읍이라고 하여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진한 2조대는 장자현을 세웠고 수나라 개황9년(589년)에 기씨현으로 개명하였다가 개황18년(598)년에 다시 장자현으로 바꾸었다.
 

호관현

 

현성의 북쪽에는 백곡산(지금의 노정산)이 있고 남쪽에는 쌍룡산이 있는데 두산이 양면에 우뚝 솟아 중간이 텅 빈것처럼 형세가 항아리 같았고 호구를 관문으로 하였기에 “호관”이라고 이름짓게 되였다.서한고제원년(기원전206년)에 호관현을 설치하였다. 
 

평순현

 

명나라때 청양리라고 불렀으며 노성현에 속하였다.가정3년(1524년)에 진경의 농민무장혁명이 폭발하였고 사태를 평정한 후 청양리농민들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가정8년(1529년)에 여성,노성,호관의 땅 “31리”를 떼여 진경무장혁명이 일어났던 중심인 청양리에 현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하기에 “모반자를 평정하고 사람들의 의향에 따른다”는 뜻으로 “평순현”이라고 지었다.
 

여성현

 

춘추시대에는 여후국이였다.한,삼국,2진시기에는 노현의 땅이였다.북위시기 태평진군11년(450년)에 노성현을 취소하고 예릉현을 세웠고 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여성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양원현

 

전국시기 조양자가 성을 쌓은것으로부터 이름을 얻었다.서한시기에 양원현을 설립하였고 북위시기에는 양원군이라고 하였다.북주건덕6년(577년)에는 양원군을 한주라고 바꾸었으므로 “고한”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무향현

 

경내에 무산과 무향수가 있는 것으로부터 이름을 짓게 되였다.서한시기에 날씨현을 세웠고 동한때 날현으로 바꾸었다.서진황제 진무의 태시년간에  날현을 무향과 노양,날 3개현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바로 무향현 이름의 첫시작이다. 
 

심현

 

춘추시기 현경계에는 적적이 살았고 한나라때부터 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수나라개황16년(596년)에 심주를 세웠는데 심하가 심주경내에 있다고 하여 이름을 얻게 되였다.명나라 홍무년간에는 심주가 무향,심원 2현을 거느렸고 청나라에서 명나라제도를 답습하여 여전히 심주라고 불렀다.1911년 주를 취소하고 현으로 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부터 따서 처음으로 심현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심원현

 

서한시기 처음으로 현을 설치하고 통치하였는데 이름은 곡원현이였고 상당군에 속하였다. 신망시기에 곡근현이라 바꾸었고 동한시기에 다시 곡원현으로 되였다.북위효장제 건의 원년(528년)에는 심하가 현경계북부의 이랑신구에서 발원한다고 하여 심원현이라고 이름을 정하였다.

 

진성시
 

옛날에는 택주라고  불렀으며 주나라때에는 진나라땅이였다.기원전376년에 위,조,한 3개 씨족이 진나라를 분할하고 진정공의 단씨를 탈취하였으며 고도를 봉지로 떼어 주었다.진성은 진나라 군주봉지라는뜻에서 이름을 얻게 되였다.1983년에 진성현은 진성시(현급)로 개편되였고 1985년에 진동남지구를 취소하고 진성시는 지급시로 승격하였으며 1개 구 1개 시 4개 현을 관할한다.
 

 

 

진성시성구


1985년에 진성시는 지급시로 승격되였으며 원래 관할구역을 시내구역과 교외구역(지금의 택주현)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바로 도시설립의 시작인 것이다.


택주현
 

진한시대에 고두현,양아현,고두군을 세우고 북위때에는 건주에 속하였다.수나라 개황3년(583년)에 건주가 획택하옆이라고 하여 택주라고 바꾸었다.당나라 무덕3년(620년)에 진성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후에 여러번이나 바뀌였으며 진성,단주라고도 불리웠다.1985년에 진성시는 지급시로 승격되였고 원래 관할구역을 시내구역과 교외구역으로 나누었으며 1996년에 교외구역을 취소하고 택주현이라고 개편하였다.
 

고평시
 

북위영안2년(529년)에 고평현을 세웠는데 경내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부가 평지였기에 이로부터 이름을 따왔다.북제천보7년(556년)에 고평현을 평고현으로 개명하였다가 북제말년에 고평현으로 회복되였으며 1994년에 현을 취소하고 시로 개편되였다.
 

양성현
 

옛날에 확택이라고 불리웠고 당나라 천보원년(742년)에 확택현을 양성현이라고 바꾸었으며 현성소재지 양릉역이 양아고성이라고 하여 이름을 얻게 되였다.아양고성은 남쪽으로 학산에 이르고 지세가 높고 험준하였다.《이아(尔雅)•석지(释地)》에 이르기를 양천의 물이 이곳을 흘러간다고 하여 양하 혹은 양릉이라고 불렀다.
 

능천현
 

주나라때에 晉나라에 속하였고 秦나라시기에는 상당군에 속하였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고평지를 분할하여 능천현을 세웠는데 산천이름에서 따온 것이다.원세조부터 원나라3년(1266년)에 이르기까지 진성현에 합병되였고 원나라31년(1294년)에 능천현을 다시 회복하였다.
 

심수현
 

진한시기에 단씨현을 세웠고 북제시기에 영녕현이라고 개명하였다. 수나라개황18년(598년)에 심수현이라고 바꾸어 불렀는데 그것은 경내에 심하가 관통한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임분시
 

북위시기에 지금의 임분시에 “백마성”을 건립하였고 평양현을 이곳으로 옮겼다.수나라 개황3년(583년)에 수문제 양견은 “평陽”과 “평楊”이 같은 발음이라고 하여 평양현을 임분현이라고 개명하였으며 “빈림분하”에서 그뜻을 가져왔다.1971년에 이곳에 임분시를 설립하였고 2001년에 지급임분시로 되여 1개 구 2개 시 14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요도구


요도구는 전해져 내려오는 다섯황제중의 하나인 문명의 시조황제 요도당씨에 의하여 건설된 것이며 수도를 건립한 곳이다.춘추시대에 진나라는 평양현을 설치하였고 秦,한,위,晉시대를 거치면서도 바꾸지 않았다.2001년에 지급임분시를 설립할때 현급임분시를 요도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요도평양”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후마시


옛날에는 “신전”이라고 불렀으며 춘추시대에는 진국의 수도였다.진,한나라는 강현을 설립하였고 유방은 이곳을 강후로 주발에게 봉지로 주었다.동한,위,2개 진은 강읍현을 설립하였고 명나라 홍무8년(1375년)에 강주의 금합역을 “하마리”역전으로 바꿀때 “하마”를 기피하여 “하”가 당지에서 지방언어로 “후”라고 읽는다고 하여 역전을 등록할때 “후마역”이라고 하였다.후마는 이때로부터 정식지명으로 되였다.1958년에 곡옥,신강,분성을 합병하여 후마시를 세웠으며 1962년에는 시를 취소하고 곡옥현으로 다시 개명하였다.1971년에 후마시를 다시 회복하였다.
 

곽부시
 

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곽읍현이라고 고쳤으며 금나라 정우3년(1215년)에 곽주를 세웠는데 경내에 곽태산이 있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1912년에 강주를 현으로 하고 처음으로 곽현이라고 부르게 되였다.1990년 현을 폐지하고 시로 개편하였으며 곽주시라고 불렀다.
 

곡옥현
 

곡옥현의 이름은 서주초기부터 있었는데 “옥천”(지금의 경명폭포)에서 나와 구곡이 북으로 회하에 흘러들고 빙빙 맴돌다가 서쪽으로 분하에 흘러들어간다고 하여 곡옥이라고 지었다.주평왕26년(기원전745년)에 진소후는 성사(환숙)에게 이곳을 봉지로 주었고 호를“옥국”이라고 하였다.서한시기에 강현을 세웠고 동한때에는 강읍현이라고 개편하였으며 북위 태화11년(487년)에 강읍현을 폐지하고 곡옥현이라고 하였다.


익성현


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고익성이라는 이름이였다.고익성은 지금의 남량상고산아래의 고성촌으로 산지형이 날개 펼친 새와 같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것이다.


부산현


당나라 무덕2년(619년)에 부산현을 설립하였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요순시대에 홍수가 넘쳐흘렀는데 산이 물을 따라 높았다 낮았다 하여 마치 떠다니는 듯하다고 하여 “부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양분현
 

양릉,분성 2개 현은 1954년9월에 합병되여 양분현이 설립되였다.원래의 양릉현경내에 진양공의 능묘가 있다고 하여 얻어진 이름이며 분성은 분하해안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이름을 얻었다.


홍동현
 

원래는 춘추시대 진나라에서 세운 양씨현이였는데 후에 양현으로 바꾸었다.수나라 의녕원년(617년)에 이원이 수나라 대권을 장악한후 수나라 “양”성을 기피하여 양현을 홍동현이라고 바꾸었다.현지기재에 의하면 성남에는 고대전설중의 신선 홍애가 살었던 “홍애고동”이 있는 것에서 유래되였다고 한다.
 

안택현
 

서한시기에는 의(陭)씨현이라고 불렀는데 동한시기에 와서 의(猗)씨로 바꾸었다.북위 건의원년(528년)에 의씨를 기씨로 바꾸었고 서부(지금의 고현경)에 안택현을 세웠다.당시 현소재지가 안길,택천사이에 있다고 하여 두곳의 첫글자를 따서 이름지었다.


고현
 

고현은 고대의 악양이며 원래 북위건의원년(526년)에 세운 안택현이다.수나라 대업2년에 악양현으로 바꾸었고 1914년에 악양현을 안택현이라고 바꾸었다.1971년에 안택현서부의 7개 공사와 부산현 북부의 3개 공사를 떼어내여 현을 세우고 “악양”이라는 현이름(호남성에 이미악양시가 있었음)을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여 고현이라고 이름지었다.
 

분서현


북제가 이곳에서 분수군 및 분수현을 세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을 폐지하였다.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임분현을 분서현으로 바꾸었는데 분하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이름짓게 되였다.
 

포현
 

옛날에는 포자국이라고 불렀는데 당제요의 태사 포이자가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은상시기에는 “기방후국”이라고 불리웠고 춘추시대에는 진국포읍에 속하였다.한나라때는 포자현의 땅이였고 동진 태원11년(386년)에 정양현을 세웠다.북위태화21년(497년)에 정양현을 석성현이라고 바꾸었고 북주 대상원년(579년)에는 포자현으로 회복하였으며 수나라 대업원년(605년)에 포현으로 바뀌였다.
 

향녕현


북위때 창녕현,평창현을 설립하였고 당나라 시기에 평창을 창녕에 편입시켰으며 4대후당 동광원년(923년)에 당장종 이존욱의 조부 이국창 존명을 기피하여 창녕현을 향녕현으로 바꾸었다.


길현
 

춘추시대에 진국의 굴읍이였는데 북굴이라고도 불리웠다.진나라는 북거현을 세웠고 북위는 이곳의 정양현을 정양군으로 하였다.수나라 양견은 “정陽”과 “정楊”이 발음이 같은 것을 기피하여 정양(陽)군을 문성군으로,정양(楊)현을 길창현으로 바꾸었다.금나라때에는 길창현을 길주로 개명하였고 1912년에 주를 폐지하고 길현을 설립하였다.


대녕현
 

옛날에 속수현이라고 불리웠다.당지의 부윤은 귀화현(지금의 영화현)과 경계분쟁으로 무력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피면하기 위하여 두개 현이 영원히 화목하라는 의미에서 속수현을 대녕현이라고 개명하였다.
현수나라 개황5년(585년)에 습주라고 불렀다.당나라 “원화군현지”의 기재에 의하면


영화현


옛날에 귀화현이라고 불렀다.당지의 부윤은 속수현(지금의 대녕현)과 경계분쟁으로 무력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피면하기 위하여 두개 현이 영원히 화목하라는 의미에서 귀화현을 영화현이라고 개명하였다.
“《이아•석지》왈: ‘하습위습’.주대천박하습,고로 습위명”이라고 하였다.1912년에 습주를 습현으로 불렀다.

 

운성시


운성은 “염운지성”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되였다.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한,조,위3개씨족이 진나라를 분할한 후 운성은 위나라에 속하게 되였다.진시황은 36군을 설립하였는데  운성은 하동군에 속하였으며 줄곧 하동이라고 불리웠다.1949년에 운성전서를 설립하였고 1954년에 운성과 임분 2개 전구를 합병하여 진남전구라고 하였다.1970년에 진남지구를 철회하고 다시 운성지구를 설립하였다.2000년에 지급운성시로 개편되였으며 현재 1개 구 2개 시 10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염호구


1950년에 운성전구에서 운성을 다스렸다.1954년에 운성전구를 철회하고 진남전구에 속하게 하였다.1954년7월에 해현과 우향을 합병하여 해우현을 설립하였다.1955년7월 운성진은 안읍현에 편입되였으며 1958년11월에 안읍,해우,임의를 합병하여 운성현을 설립하였다.1960년1월부터 1961년7월까지 임의,영제현,원해현,안읍을 각각 분리하였으며 여전히 운성현이라고 하였다.1983년에 운성현은 운성시로 개편되였고 2000년에는 운성시를 염호구라고 고쳤는데 이것은 경내에 있는 염지로부터 “염호”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영제시


영제는 예전에 포판이라고 불렀다.진나라에서 포판현을 설립하였고 청나라 옹정6년(1728년)에 포주를 부로 승격시켰고 부곽을 영제현에 설립하였다.현의 이름은 경내에 명나라 수리공정인 영제거로부터 따온 것이다.
 

하진시
 

전국시기에 위나라의 피씨읍이였고 진나라에서 피씨현을 설립하였다.왕망천봉원년(14년)에 연평현으로 고쳤고 동한때에 피씨현이라고 다시 불렀으며 북위태평진군7년(446년)에 용문현으로 고쳤다.송나라 선화2년(1120년)에 하진현이라고 개명하였는데 경내에 황하의 우문나루터가 있는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1944년에는 현을 폐지하고 시를 설립하였다.
 

임의현
 

임의현은 1954년에 세워진 것이다.임씨,의씨 2개 현이 합병하여 각각 첫글자를 따서 이름지은 것이다. “임진”일명의 유래에 대하여 해석이 있다.춘추시대에 진나라가 황하 서안에 성보를 건축하고 “이림진국”이라고 한데서 임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였다.다른 한가지는 이곳이 춘추시기에 진양이라고 불리웠고 당나라시기에 진성이라고 불리웠다 하여 임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임의”일명도 유래가 있는데 하조때 고의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노사》에서 말하기를 “하유의국” 한나라에서 의씨현을 세웠다고 한다.
 

만영현


만영현은 만천,융합 2개현이 합병되여 각각 첫글자를 따서 이름지은 것이다.만천은 “성림산간,지다용천”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되였다.당나라 무덕3년(620년)에 직한,안읍,의씨,분음,용문 5개현의 땅을 떼어내여 만영현을 설립하였다.영하는 서주의 경지였고 개원10년(722년)에 후토사를 수리한후 고정을 얻었고 보정현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송 대중상부4년(1011년)에 영하가 흘러넘쳤는데 사람들은 이를 상서롭다고 여기고 영하현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1954년에 만천,영하 2개 현은 합병되였다.
 

직산현


상주시기에 직이라고 불렀다.춘추시기에는 진나라에 속하였고 청원이라고 불렀다.전국시대에는 위나라에 속하였다가 후에 조나라에 속하게 되였다.진나라때에는 하동군에 속하였고 서한때에는 분하를 경계로 분남은 좌읍현(지금의 문희)에,분북부분은 장수현(지금의 신강)에 속하였다.동한때 분북은 피씨(지금의 하진)와 합병되였고 분남부분은 문희현에 합병되여 직산정을 세웠다.북위초에 용문군에 속하였고 태화11년(487년)에 고량군을 설치하고 고량현을 설립하였다.수나라 개황2년(582년)에 강주를 정평으로 옮기였고 분북에 현성을 건축하였는데 경내에 직왕산이 있는것으로부터 직산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강현
 

북위등국원년(386년)에 태평현이라고 불렀고 수나라 개황3년(538년)에 정평현을 설립하였다. 대업2년(606년)에 강주로 바꾸었는데 정평,익성,곡옥,직산,용문,원곡,태평,강현 등 8개 현을 이끌었다.1912년에 주를 폐지하고 신강현이라고 불렀는데 “함여유신”이라는 뜻에서 이름지은것으로 강현과 서로 구별하게 새로운 강현이라고 하여 신강현이라는 이름이 시작되였다.
 

강현
 

경내에 강산이 있는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되였다.춘추시기에 “차상성”을 세웠다. 주혜왕8년(기원전669년)에 진헌공이 대부를 파견하여 성을 쌓아 취를 건설하였고 수많은  공자들을 모조리 살해하였으며 차상성을 처음으로 강이라고 명명하였다.그후부터 강을 도읍으로 정하였다.한,조,위 삼국이 진나라를 분할한 후 강은 위나라에 속하였다.진나라때는 하동군에 속하였고 서한때에는 강의 땅을 확장하여 곡옥,익성을 강현으로 합병하였다.북위태화18년(494년)에 강산을 변계로 남강현을 설치하였고 서위대통5년(539년)에는 남강현을 강현이라고 고쳐 불렀다.
 

원곡현
 

경내에 군산이 담과 같았고 또 이곳에 있는 구곡황하강반이라고 하여 이름을 지었다.상,주시기에는 “긍방”이였고 후국의 땅이였다.춘추시기에는 진나라에 속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위나라에 속하였으며 진나라때에는 하동군에 속하였다.한나라에서 원현을 설치하였고 남북주는 한때 백수현,호성현 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송대에는 원곡현이라고 바꾸었는데 이때로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문희현
 

진나라때에는 좌읍현이라고 불렀다.서한원정6년(기원전111년)에 무제 류철은 하남구씨에 순행을 나갔는데 도중에 좌읍의 동향을 지날때 남월(남월국-지금의 광동,광서일대)을 돌파하였다는 기쁜소식을 듣게 되였다.그리하여 즉시 동향을 문희현이라고 바꾸게 되였다.

 

하현
 

고대에는 안읍의 땅이였는데 하우의 옛도읍으로부터 이름을 짓게 되였다.4500년전 대우는 이곳에 도읍을 건립하였다.대우는 치수에 공을 세운것으로부터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였고 국호를 하라고 하였다.하는 익주에 속하며 후국의 땅이였고 주는 진국의 땅이였다.북위태화18년(494년)에 하현을 설치하였다.
 

평륙현
 

하나라때 우라고 불렀다.주나라초 무왕은 중옹의 후손에게 이곳을 봉지로 주었고 국호를 여전히 우라고 하였다.춘추시기에는 진나라에 속하였고 태양읍이라고 하였다.한나라때 처음으로 태양현을 설치하였고 태양현이라고도 불렀다.북주태화2년(567년)에 하북현이라고 고쳐 불렀고 당나라 천보원년(724년)에 협군태수 이제물이 삼문조길에서 고대칼을 얻었는데  칼날에 해서체문으로 “평륙”이라고 씌여있는 것을 보고 상서롭다고 여기여 현의 이름으로 짓게 하였다.
 

예성현


서주초 무왕은 희성자제에게 이곳을 봉지로 주었고 위국이라고 불렀다.진헌공은 위나라를 멸망시킨 후 대부 예필만에게 이곳을 봉지로 주었고 이름을 예성 또는 위성이라고 하였다.한나라때에 하북현을 설치하였고 서위때에 지금의 현동쪽경계에 안융현을 설치하였다.북주명제2년(558년)에는 예성현을 건립하였고 당나라 무덕2년(619년)에 예주를 설립하였으며 예성,영락현을 관할하게 하였다.명나라 청나라시기에는 줄곧 예성현이라고 하였다.


 


 

 


 


산서현 이름의 유래

태원


태원 즉 대평원(고대시기에 “대”와 “태”는 통용되였다)을 말한다.《시경》,《상서》,《좌전》 등 전적중에 “험윤을 토벌하기 위하여 대원까지 이르렀다”, “분하와 조수의 물길을 트게 하여  큰 호수를 가로막아 대원을 만들었다 ”고 하였는데 이 가운데 있는 대원도 마찬가지 뜻이다. “태원”이 지명으로서 불리우게 된 것은 춘추시대이후부터였다.전국시기에 태원은 조나라의 땅으로 도읍은 진양이였다.진나라 장양왕2년(기원전248년)에 진나라는 “몽오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태원으로 정했다”.이듬해 “처음으로 태원군을 설치하였다”.지방관청은 진양에 있었는데 태원군의 시작이다.송,금,원,청시기에 “태원”은 광의로 태원부를 가리키고 협의로 당명진의 기초에서 발전해 나온 태원성을 가리킨다.민국16년(1927년)에 태원시를 설립하였고 현재 6개 구 1개 시 3개 현을 관할한다.

 


 

 

소점구


소점촌으로부터 이름을 얻었다.촌락은 북송초년에 형성되였는데 송나라가 진양성을 훼손한 후 이곳은 새로 세운 평진현성으로 되였고 서쪽으로 진양고성으로 통하는 분하나루터의 요지로 되였다.처음에는 작은 여관들이 있었지만 후에는 장사치들이 모이는 집성촌으로 되였다.가게가 작고 많았기에 소점이라고 불렀다.명나라 가정년대의 《태원현지》에 “소점보는 원래 영안보였는데 사방으로 통하는 길로 되였다”고 기재되였다.1954년 태원시제4구를 소점구로 고치고 구정부는 소점촌에  설치하였다.1970년에 태원시교외구역은 남과 북쪽 교외구역으로 나뉘였는데 남쪽교외구역정부는 소점진에 설치하였다.1997년 태원시는 작은구역 행정구획을 실시하였는데 원래의 남쪽교외구역을 소점구로 바꾸었다.
 

영택구
 

영택문에서 따온 이름이다.명나라 홍무년간에 태원성을 확대건축하였는데 영택문(대남문이라고도 부른다)은 8대성문중의 하나이다.태원이 해방된 후 대남문밖에 영택거리,영택공원,영택호텔 등을 새롭게 건축하였다.1997년 태원시는 관할구 행정구획을 실시하였는데 “영택”에서 이름을 따서 원래의 남성구를 영택구로 고쳤다.


행화령구


명진왕부의 화원에서 따온 이름이다.명나라 홍무년간에 이곳은 진왕부의 화원이였다.살구나무를 많이 심었고 지세가 비교적 높았으므로 “행화령”이라고 불렀다.태원이 해방된 후 경내에 행화령거리를 세우고 행화령사무소 등을 설치하였다.1997년에 태원시는 관할구역 행정구획을 실시하였는데 “행화령”에서 딴 이름으로 원래의 북성구를 행화령구로 고쳤


첨초평구
 

훨씬 먼 예전에 이 지구에 일종의 뾰족하고 가시가 있는 화초가 대량으로 자라고 있다고 하여 첨초평이라고 불리웠다.태원이 해방된 후 경내에는 첨초평거리,첨초평입체다리,첨초평사무소 등을 설치하였다. “첨초평”이라는 단어는 이미 원래의 범위를 벗어나 태강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지구를 다 가리키게 되였다.1997년에 태원시는 관할구역 행정구획을 실시하였는데 “첨초평”이라는 이름으로 원래의 북교구를 첨초평구로 고쳤다.


만백림구
 

측백나무수림으로부터 얻어진 이름이다.태원이 해방되기 전에 당지의 주민들은 대량으로 측백나무를 심었는데 그 수량이 너무도 많아 “만백림”이라고 부르게 되였다.1954년에 태원시제5구역을 만백림구라고 고쳐 불렀다.1997년에 태원시는 관할구역 행정구획을 실시하였는데 “만백림”의 이름으로 원래의 하서구를 만백림구로 고쳤다.
 

진원구
 

진수로 부터 얻어진 이름이다.위치가 진수의 발원지끝에 있다고 하여 진원이라고 불렀다.옛날 기재된 바에 의하면 “섭부가 진수옆으로 옮겼다”라고 하였다.당나라는 진으로 고쳐 불렀는데 이는 당진이 처음 시작되였음을 알린다.1947년에 진원현을 설립하였고 1954년에 태원시제6구를 진원구라고 고쳐 불렀다.1997년에 태원시는 관할구역 행정구획을 실시 하였는데 “진원”의 이름으로 진원구를 설립하였다.
 

고교시
 

원래는 교성이라고 불리웠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이곳에 교성현을 세웠다.당나라 무후천수2년(691)년에 현소재지를 산남각파촌에 옮기여 점차 고교성이라고 부르게 되였으며 약칭으로 故교라고 하였는데 故와 古의 의미가 동일하여 점차 古교로 되였다.청나라때에는 고교진이였다.1958년에는 고교광공구를 설립하였고 1988년에 다시 고교시로 개편되였다.


청서현


청원현과 서구현 2개 현의 첫글자를 합하여 이루어진 이름이다.청원은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청원수에서 따온 이름이다.민국5년(1916년)에 청원현을 폐지하고 서구현과 합병하여 원래의 현청소재지를 청원진으로 바꾸었다가 이듬해 다시 청원현으로 고쳤다.서구는 금수,상요 2개 강이 합쳐 서서히 흘러 내려오다가 물이 불어나면서  골이 생겨났고 이 옛 골을 경계로 성을 건축하였다고 하여 이름을 서구라고 지었다.금나라 대정29년(1189년)에 다시 서구현을 설립하였다.1952년에 청원현과 서구현은 합병하였고 2개 현의 첫글자를 따서 청서현이라고 이름지었으며 유차전구에 속하게 하였다.1958년에 청서현은 태원시 관할로 되였다.
 

양곡현
 

한나라때 양곡현을 설립하였고 지금의 정양현경내에 있다. 《25사보충편 한서지리지보충지》에는 “응소가 말하기를:천리나 되는 강의 일곡이 있는 현이름에 양이 있는데 그 양을 따서 양곡현이라고 불렀다”수나라 개황6년(586년)에 수문제 양견은 양곡의 “곡”자를 기피하여 양직현이라고 바꾸었다가 그후에 다시 양곡현으로 바꾸게 되였다.송나라 평흥7년(982년)에 양곡현 지방관청은 태원성서곽외로 옮기였으며 금나라 천회년간에는 태원부성내로 옮기였다.그리하여 양곡현은 산서성에서 제일 처음으로 되는 현이며 역사상 “3진수읍”이라고 부른다.
 

누번현


고대의 누번부락으로부터 이름을 짓게 되였다.역사상에는 누번국,누번군,누번감,누번현 등 행정기관을 설립하였지만 관청은 대부분 지금의 경내에 있지 않았다.지금의 누번에 있어서 특정된 지명에 관하여서는 당나라때부터 시작되였다.당나라 용기원년(889년)에 누번현을 설립하였고 후에 폐지하였다가 다시 설립하였다.명나라 초에 현을 폐지하고 진으로 개편되였으며 정락현에 속하였다.1971년에 다시 누번현을 설립하였고 려량지구에 속하게 하였다.1972년에 누번현은 태원시 관할로 되였다.

 

대동시
 

수나라 개황년간에 돌궐의 진공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내몽골오랍특전기에 대동성을 건설하였는데 “천하대동”(사람마다 평등하고 자유롭다)이라는 뜻이다.당나라 말기 사타인이 안으로 이동하여 대동도 따라서 이곳에 설치되였다.이때로부터 대동의 이름은 계속 바뀌지 않고 사용되여 왔다.대동은 역사상에서 줄곧 북방중국의 중심도시로서 “3대수도, 2조요지”였다. (3대수도:북위전기수도,요,금나라 제2의 수도; 2조요지:명나라청나라2개 조대의 요충지) 대동은 자고로 군사요충지와 전략중심지로서 군사가들이 쟁취하려고 하는곳이였다. “동으로는 상곡과 이어졌고 남으로는 평항에 이르렀으며 서로는 황하에까지 범위가 닿았고 북으로는 사막을 공제하였다.실로 수도의 장벽이였으며 중원의 보장이였다.”4개 구 7개현을 관할한다.
 


 

 

대동시성구
 

1949년5월2일,대동은 평화적으로 해방되였고 현을 시로 고쳤다.성구는 시의 일부분으로 성내라고 불렀다.처음에는 4개 구를 설치하였는데 1950년에 3개 구로 바꾸었고 1952년에는 2개 구만 설치하였다.1구는 동북우(구석)와 서북우,북관이였고 2구는 동남우,서남우,남관,동관이였다. 구공소는 구인민정부로 바꾸었고 1954년2월에 성내의 1구와 2구를 합병하여 대동시시내구역을 설립하였으며 동년4월에 대동시도시구역으로 바꾸었다.
 

대동시광구


1950년3월 대동시는 구천광구사무소를 설립하였고 1951년4월에 구천광구인민정부로 개명하였다.1955년에 구천광구는 구천구로 고쳤고 1966년5월에 도시구역,구천구역이 관할하는 농업구역을 떼내여 교외구역을 설립하였으며 구천구는 도시사업의 중심으로 되였다. 1970년10월에는 구천구역에서 나와 대동시광구를 설립하였다.
 

남교외구역
 

1950년3월 대동시에 구천광구사무소를 설립하였고 1951년4월에 구천광구인민정부로 개명하였으며 1955년 구천광구는 구천구역으로 바뀌였다.1966년5월에 도시구역,구천구역이 관할하는 농천구역을 떼내여 교외구역을 설립하였으며 1970년10월에 교외구역을 취소하고 정식으로 남교외구역을 설립하였다. 
 

신영구
 

건국초기 이구역은 대동시와 좌운현에 나뉘여 속해 있었는데 차하르성에 귀속되였다.1958년에 곽가요,동승장,파로 3개 향 외 기타 구역은 대동시교외구역으로  구분편입되였다.1960년에는 고성구역에 속하게 되였으며1964년에 대동현관할로 회복되였다.1970년에 지금의 신영촌 서쪽에서 대동시북교외구역을 설립하였고 1972년4월에 소재지 마을이름을 신영구로 개명하였다.
 

대동현


현의 이름은 “대동시”의 이름을 딴것과 마찬가지이다.1949년  5월 대동이 해방되고 동,서 대동현이 합병되였으며 차하르성 안북지구에 속하게 되였다.1952년에는 산서성안북지구에 속하게 되였고 1954년에 회인현과 합병하여 대인현으로 되였다.1958년에는 대동시로 귀속되였고 대교외구역으로 불리웠다.1960년 원대동현을 구분하여 고성구로 하였고 1965년에는 대동현편제를 회복하여 안북전서로 돌아갔다.1993년7월1일 안북지구는 대동시와 합병하여 대도시로 귀속되였다.대동현행정중심은 자고이래 줄곧 시내구역에 있었고 1971년에 서평진으로 옮겼다.
 

양고현


한나라는 고류현을 세웠고 후에 항주고류군이 고류와 안양 2개현을 거느리게 되였다.명나라 홍무26년(1393년)에 양과 위를 세웠다.31년(1398년)에 지금 이곳에 성을 쌓았는데 성이 양하강반에 있다고 하여 비슷한 이름을 따서 양화성이라고 불렀다.선덕원년(1426년)에 고산위로 옮기고 동치시대에 또 양하통판을 세웠다.청나라 순치3년(1646년)에 양하와 고산을 합쳐 양고위로 하였고 옹정3년(1725년)에 위를 현으로 개편하였으며 이로부터 양고현이라는 이름이 있기 시작하였다.


천진현


전국시대에 조나라의 능읍까지 늘어났으며 당나라는 천성군을 설치하였고 요와 금, 원나라도 잇달아 천성현이라고 하였다.명나라초(1368년)에 천성위라고 바꾸었다.홍희원년(1425년)에 진로위를 동시에 세웠으며 청나라 순치3년(1646년)에 천성,진로 2개 위를 천진위로 합병하였다.옹정3년(1725년)에 천진현으로 개편하였다.
 

혼원현
 

서한때 곽현과 평서 2개 현을 세우고 안문군과 대군에 갈라 속해있었으며 2개 현을 합병하여 곽현이라 부르고 항산군에 속하게 하였다.동한건무년간에 곽현을 취소하고 당산관(당산은 지금의 항산.문제 유항의 이름을 피하여 개명한것이다.)을 세웠다.삼국시기에 조위는 곽현을 다시 회복하였고 북위는 관산현이라고 하였으며 사주에 예속되였고 수도부근의 땅이였다.당나라 초에 운주속지로 되였고 후에 혼원현으로 불리웠는데 혼하의 발원지라는것으로부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영구현
 

영구의 이름은 전국시대에 이미 나왔다.조나라 무령왕이 죽은후 이곳에 묻었다고 하여 이름을 얻게 되였다.한고조11년(기원전196년)에 영구현을 설치하고 유주대군에 속하게 하였다.동한때에는 중산국에 속하였다가 후에 폐지되였고 북위때 다시 영구군을 회복하고 사주에 속하게 하였다.
 

광령현


전국시대에 평서읍이라고 불리웠으며 조나라에 속하였다.진나라때는 대군에 속하였고 서한년간에 평서현을 세웠으며 유주대군에 예속되였다.요나라 통화13년(995년)에 광령현을 세웠는데 현서쪽 15킬로미터 되는 곳에 광령천이 있다고 하여 이름짓게 된 것이다.
 

좌운현
 

명나라 홍무26년(1393년)에 진삭위를 세웠고 영락7년(1409년)에 좌위로 개명하였다.정통14년(1449년)에 장성밖의 운천위와 합병하여 좌운천위라고 불렀다.청나라 옹정3년(1725년)에 위를 취소하고 현을 설치하였으며 좌운현이라고 불렀다.

 

삭주시
 

“삭”은 지명으로서 땅의 북단을 가리키고 나라의 변계를 가리키며 두나라의 접경지대를 말한다.북제천보6년에 마읍의 서남쪽 47킬로미터인곳에 새로운 성 삭주를 세웠다.8년에는 마읍고성으로 옮겼는데 바로 지금의 삭주성이다.그후부터 몇천년의 역사가 흘렀지만 삭주의 지명과 땅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고정되여 있었다.1989년에 삭주시를 설립하였고 현재 2개 구 와 4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삭성구


“삭”의 의미는 “삭주”의 삭과 같다.요황제시기에 기주지역이였고 순황제시기에는 병주에 속하였다.하나라때에는 훈육(薰鬻)에 속하였고 상나라때는 토방에 속하였다.서주때에는 북융에 속하였고 춘추시대에는 북적이 점거하였다.전국시기에는 조나라관할이였고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에는 이곳에 마읍현을 만들었다.북제시기에 삭주를 설립하였는데 명나라 청나라까지 연속되였으며 민국초에 삭현을 설립하였다.삭주시가 1989년에 성립된 후 삭현은 삭성구로 이름을 바꾸게 되였다.
 

평로구
 

명나라때 평로위를 세웠고 청나라때는 평로현이라고 하였다.1958년에 평로와 삭현이 합병되여 삭현이라 불리웠고 1961년에 평로현이 회복되였다.1989년에 평로현을 취소하여 평로구로 개편하였다.
 

산음현
 

춘추시대에 대국의 땅이였다.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고 진나라때에는 안문군에 속하였다.수나라때에는 신무현의 땅이였고 마읍군에 속하였다.당나라시기에는 마읍현의 땅이였고 삭주에 속하였다.요나라는 하음현을 설립하였고 금나라 대정7년(1167년)에 산음현으로 개명하였는데 항산의 갈래인 취미산의 음달진 언덕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이름을 얻게 되였다.

 

회인현


춘추시기에는 대에 속하였고 전국시기에는 조나라에 속하였으며 진한때에는 안문군에 속하였다.수나라때에는 운내현의 땅이였고 당나라때에는 운중현의 땅이였다.요나라는 회인현을 세웠고 후에 당나라 무황 이극용과 요나라 태조 야율 아보기가 운주의 동성에서 동맹을 맺어 “회상인인”이라는 뜻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응현


당나라때에는 마읍현의 땅이였고 당나라 말기에 응주를 세웠다.민국원년에 응현이라고 고쳤는데 경내에 용수,안문 두개 산이 남북으로 상응하고 있는사이에 성이 있다고 하여 지은 것이다.


우옥현


명나라 홍무25년(1392년)에 정변위를 세우고 영락7년(1409년)에 대동우위를 다시 설립하였다.정통년간에 변외 옥림위를 우위에 합병시키고 우옥림위라고 불렀으며 청나라 초에 우옥위라고 불렀다.옹정3년(1725년)에는 우옥현으로 개편되였다.

 

흔주시
 

옛적에는 수용이라고 불렀으며 춘추시기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다.진나라는 구주산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안문군에 속하고 남쪽은 태원군에 속하였다.동한말년에 신흥군을 설립하였고 서진은 신흥군을 금창군으로 고쳤다.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군을 폐지하고 주를 설치하였는데 처음으로 흔주라고 불리웠고  “흔구가 있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전해지는 다른 설로는 한고조가 북상하여 흉노와 대항하여 싸울때 병사가 평성(지금의 대동)에 갇히게 되였다.포위를 뚫고 나올때 대군이 남쪽으로 철퇴하여 흔구에서 곤경에서 벗어났다고 한다.고조는 너무 기뻐 즐겁게 웃었고 6군은 흔연히 돌아왔다고 한다.여기에서 “기뻐할 欣”이 “흔(忻)”과 통하기에 흔주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1949년 경내를 흔현지구전서로 하였고 1983년에는 흔주지구행서라고 고치였으며 2001년에는 흔주시라고 개편하였다.현재 1개 구 1개 시 12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흔부구


“흔”의 뜻은 “흔주”와 마찬가지이다.민국초에 흔현이라고 바뀌였고 1983년에 흔주시로 되였으며 2001년에 흔부구로 부르게 되였다.
 

정양현


“사기정의”에 기재된데 의하면 고대시법에 따라 “벽지위양”, “벽지유덕,양”이라고 한다.서한은 정양군을 설립하였고 군소재지는 지금의 내몽골허린거얼(몽골언어)북쪽에 있었다.허린거얼 일대를 정양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새제도를 실시하는 이 지구가 안정되였다는 표시였다.후한말기에 내몽골에서 금치로 옮겼고 당나라 무덕4년(621년)에 금치에서 정양현을 설립하였다.
 

오대현
 

북위태화10년(486년)에 려이현을 설립하였고 수나라 대업2년(606년)에 경내에 오대산이 있다고 하여 오대현으로 개명하였다.금나라 정우4년(1216년)에 태주로 승격하였고 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오대현으로 회복되였다.
 

원평시


지형이 평원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서한원정3년(기원전114년)에 처음으로 원평현을 설립하였고 수나라 대업2년(606년)에 곽현이라고 불렀다.당나라 신룡원년(705년)에 당림현이라고 불리웠고 1958년에 원평현으로 개명하였다.1933년에는 현을 폐지하고 시를 건립하였다.
 

대현


대현의 “대”는 대국,대군의 지명으로부터 온 것이다.고대국,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는데 조나라 무영왕이 대군을 설립하였고 진조때에는 36군중의 하나였으며 소재지는 지금의 대현이였다.한고조6년(기원전201년)에 유방은 운중,안문, 대군 중의 53개 현을 합병하여 대국을 만들었다.한대이후 대국과 대지의 이름은 경상적으로 사용되였는데 구역범위는 부단히 변화하였다.현재의 대현은 하나의 오래된 지명의 중요한 견증이다.
 

번치현


춘추시기에는 진나라에 속하였고 곽인읍이였다.전국시기에는 조나라에 귀속되였고 진나라가 6국을 멸한 후 처음으로 번치(畤)현을 설립하였다.주위에 뭇산들이 둘러싸여 있어 얻은 이름이다.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주를 폐지하고 현을 세웠으며 번치(畤)를 번치(峙)로 고쳤다.
 

정락현
 

서한초년에 분양현을 설립하였고 수나라 대업4년(608년)에 정락현으로 고쳤는데 “정화이락”의 뜻에서 지은 것이다.당나라 무덕6년(623년)에 분양,6도2현을 정락현에 합병하였다.송나라 함평5년(1002년)헌주치를 우번에서 정락으로 옮기였고 정락현을 폐지하고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희녕3년(1070년)애 헌주를 다시 설립하고 정락현을 거느리게 하였다.금나때에는 정락군을 설립하였고 천덕3년(1151년)에 관주라고 고쳤다.원나라는 금나라 제도를 계승하여 관주라 하였고 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다시 정락현으로 고쳤다.
 

녕무현


원나라 대덕5년(1301년)에 녕무둔을 건립하였고“함녕언무”의 연고로 이름 지었다.명나라 성화4년(1468년)에 녕무관을 설립하였고 옹정3년(1725년)에 녕무현을 설립하였는데 현이름을 관명에서 지은 것이다.

 

신지현
 

신지는 북쪽 황화령에서 시작되여 첩첩이 이어진 산봉우리와 구불구불한 고개에서 내려와 약 30리 흘러내린다.땅은 적고 평평한데 한갈래 물이 흐르고 온곳을 알 수 없고 가는 곳을 모른다.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하고 침수해도 넘치지 아니한다.그리하여 이름을 신지라고 하였다.또 다른 설로는 예전에 한 여자가 결혼하지 않았는데 쌍룡을 낳아 룡자가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갔다고 한다.룡모는 보이지 않고 양수만이 점점 불어나 서해자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지의 유래라고 한다.


오채현
 

명나라 가경16년(1537년)에 오채성보를 건립하였는데 성보가 관할하는 동서남북중에서 오대보채로부터 이름지었다고 한다.청나라 옹정3년(1725년)에 오채현을 설립하였다.
 

가람현
 

북위때에 수용군의 땅이였는데 경내에 가람산이 있는것으로부터 람주라는 이름을 얻게 되였다.수나라 대업3년(607년)에 가람진을 세우고 당나라 영순2년(683년)에 가람주로 바꾸었다.장안3년(703년)에 람곡현을 세우고 람주에 속하게 하였다.5대시기에는 습전제에 근거하여 의연히 람곡현이라고 하였다.송나라는 람곡현을 가람군에 세웠고 금나라때에는 군을 폐지하여 람곡현을 가람주로 승격되게 하였으며 원나라때에 폐지되였다.명나라 홍무8년(1375년)에 가람현을 가람주로 회복시켰고 민국원년에 가람현으로 다시 부르게 되였다.
 

하곡현
 

땅이 황하곡절이 있는 곳이라고 하여 “황하천리일곡”의 뜻으로 이름을 얻었다.전국시기에 조나라에 속하였고 한나라때는 서하군선무현의 땅이였다.서진때에는 강호에 속하였고 당나라때는 이방현의 땅이였다.5대북한시기에는 웅영진을 세웠고 람주에 속하였다.송나라 태평흥국7년(982년)에는 화산군을 건립하였고 치평4년(1067년)에 화산현을 세웠는데 대주에 속하였다.금나라 정원원년(1153년)에는 하곡현을 세웠고 대정22년(1182년)에 화산주로 승격되였으며 후에 오주로 개명하였다.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하곡현을 다시 세웠고 태원부에 예속되게 하였으며 옹정2년(1724년)에는 보득주에 속하게 하였다.
 

보득현


송순화4년에 정강군을 세웠고 경덕원년에 보덕군으로 고쳤으며 “민보우성,성보우덕”의 뜻에서 따 왔다.금나라 대정11년(1171년)에 보덕현을 설립하였다.


편관현
 

오대북한시기 천회원년에 한광령에서 시작하여 채를 쌓기 시작하였는데 그 땅이 동은 쳐들고 서는 엎드린것이 사람의 머리처럼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하여 편두채라고 불렀다.원나라 대덕3년(1299년)에 채를 관으로 승격하였고 옹정3년(1725년)에는 편관현을 설립하였다.

 

양천시
 

양천시지명의 형성은 이곳 특유의 “양천”자연현상 및 그 자연환경과 연관이 있다.제일 처음에는 마을이름이였다가 후에 역전이름,진이름으로 되였으며 1947년에5월에 시이름으로 되였다.청나라 광서판《평정주지》에 기재되기를 주의 서쪽으로 15리 되는곳에 샘물이 5개 있었는데 모두 평지에서 솟아올라와 양천이라고 불렀으며 잘못 전해져 양운이라고 하였다.양천촌이 설립된것은 북송시기보다 늦지 않다고 하며 마을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한개 마을이 “대양천”, “소양천” 2개 촌으로 변하였다.청나라 광서32년(1906년)에 정태철도가 소양천마을로 통하게 되였고 그곳에 역전을 세우게 되였는데 이름을 “양천역”이라고 하였으며 역전을 중심으로 점점 공상,군사요충지인 “양천진”으로 되였다.1947년5월에 양천시는 정식으로 건립되였고 중국공산당에 의해 세워진 제일 첫도시이며 현재 3개 구 2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양천시시내구역


1952년에 제1구를 설립하였고 1956년에 참상구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양천시기차역으로부터 이름을 따온 것이다.1957년에 음영구와 합병되여 교외구역으로 되였으며 1958년에 참상공사로 개편되였다.1963년에 참상구로 다시 고치고 1969년에는 시내구역으로 고쳤다.
 

양천시광구


1980년에 과거의 양천광무국정기합일기구를 행정기구로 바꾸었고 광구로 되였다.
 

양천시교외구역


1952년에 제2구를 설립하였고 1956년에 음영구로 바뀌였다.1957년에 참상구와 합병하여 교외구역으로 되였다가 1958년에 평정현의 교외구역과 합병되여 양천시교외구역으로 불리웠다.1961년에 양천시교외구역을 폐지하고 시에서 인민공사를 설립하였다.1963년에 음영구를 회복하였고 1969년에 양천구교외구역으로 고쳐 불렀다.
 

평정현


서한때 상애현이 설립되였고 북위시대에는 석애현이라고 불렀다.당나라 천보원년(724년)에 광양현이라고 개명하였고 송나라 태평흥국2년(977년)에 평정군을 이곳에 설립하였으며 4년에는 광양현을 평정현으로 고쳤다.청나라 광서판《평정주지》에 기재한 바에 의하면 “송태조는 정벌하러 하동끝까지 내려갔으며 그곳에 평정군을 세우고 진주에 속하게 하였다”. “평정”이라는 이름은 “사방이 태평해야 나라 백성도 안정된다”는 뜻이 있다.(《시경•대아•강한》을 참고)


우현
 

춘추시기에 백적인들이 수유국을 건립하였는데 전국초기에 진나라 지백(순요)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였고 그자리에 원수성을 설립하였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원수현을 설립하였고 수나라 대업2년(606년)에 우현이라고 개명하였다.현성의 4주위가 높고 중간이 낮으며 모양이 바리같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명나라시기 산서제학 심종은《제우성》이라는 시에서 “3리고성4면산”으로 우성의 지형을 묘사하였다.

 

진중시


1949년8월 유차전구를 설치하였는데 산서중부에 있다고 하여 1958년11월에 진중전구로 바꾸어 불렀고 1968년9월부터 진중지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1999년9월에 지급시로 개편하였는데 1개 구 1개 시 9개 현을 관할한다.
 


 

 

유차구
 

천추시기에 염황제8세 유망의 영지에 유주국을 세웠는데 후손들은 염제유망을 기념하기 위하여 원래의 유주국의 중심지대를 유사라고 불렀다.즉 유망황제의 나라라는 뜻이며 변강지대는 유차라고 불렀다.북위,북제시대에 두번이나 중도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공원979년에 송태종은 북한을 멸망시키고 진양을 훼멸한다음 주를 유차와 합병하였다.월나라3년에 당명진으로 다시 옮기며 유차도 현편제를 회복하였다.이후 역대 현이름은 바뀌지 않았다.1958년 현급유차시를 세우고 1999년에 유차구로 개편하였다.
 

태곡현
 

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주양왕시기에 진후는 이곳을 대부(고대관직) 양처부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였으므로 양읍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였다.서한시기에 양읍현을 세우고 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태곡산곡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현이름을 태곡이라고 하였다.
 

기현
 

기현은 “소여기택수”(잡초가 자란 늪지대)로부터 이름을 지었다.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진공2년에 기의 땅을 대부 기해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였다.전국시대에 기의 땅은 조나라에 속하였고 서한시기에 기현을 설치하였다.신망시대에 기현은 한때 시현으로 개명되였다가 동한때 다시 기현이라는 이름을 회복하였다.북제 천보7년에 기현을 폐지하였는데 수나라 개황10년에 다시 기현을 설치하고 병주에 속하게 하였다.당나라 무덕3년에 태곡현을 태주에 세우고 기현을 태주에 속하게 하였다.6년에는 태주를 폐지하였지만 여전히 병주에 속했다.송나라때에는 태원부에 속하였고 금나라때에 다시 기현이라고 부르며 병주에 속하게 하였다.원나라때에도 기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태원로에 속하였다.
 

평요현
 

춘추시기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다.한나라때 평요는 경릉,중도 2개 현 및 오현의 땅이였다.서한시기에 평요현을 세우고 북위태무제때에 중도현을 유차로 옮기고 평요현의 명목으로 통치하였다.관청은 경능촌으로 옮기고 태무제의 존명인 탁발도를 피하기 위해 평도를 평요로 고치고 동시에 경능현을 폐지하고 평요현에 편입시켰다.이때로부터 평요현이름은 줄곧 사용되였다.수나라 개황16년에 청세현을 분할하여 세웠는데 대업초년에 폐지하였고 역대로 평요현은 기본상 분주관할하에 있었다.
 

개휴시
 

기원전636년에 진문공은 돌아와서 수행대신들에게 상을 내렸다.개자는 봉록을 요구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면산에 은거하였다.진문공은 숲에 불을 질러 개자추를 불러 내리려 하였지만 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나무를 부둥켜안고 죽었다.개휴 즉 개자추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기원전514년부터 개휴역사상 선후하여 동부에 오현을 설치하였고 서부에 평주읍을 설치하였다.진시황은 군현을 설치하고 시내구역에 계휴를 설치하였는데 후에 계미,개휴,평창으로 바뀌였다.북주시기에 개휴군을 설치하였고 수나라 당나라 시기 한때 개휴군,개주를 설립하였다.
 

영석현
 

수나라 개황10년에 문제 양견은 북방순찰을 하면서 분하를 파서 길을 만들다가 하나의 큰 돌을 발견하였다.철같기도 하고 돌같기도 하며 색갈이 푸르고 소리가 쟁쟁한것이 영험하고 상서롭다고 하여 명령을 내려 “영석”이라고 이름지었으며 평창현서남땅을 떼어내여 영석현이라고 하였다.
 

유사현
 

춘추시기에 염제8세 유망의 영지에 유주국을 건립하였는데 후손들은 염제유망을 기념하기 위하여 원래의 유주국의 중심지대를 유사라고 불렀다. 이것은 유망황제의 나라라는 뜻으로 변경지대는 유차라고 하였다.남조시기에 기자의 자작국이였고 국명은 “기”였다.주조시기에는 병주에 속하였고 춘추시대에는 진나라에 속하였다. 전국시대에는 먼저 한나라에 속하였다가 후에 조나라에 속하게 되였으며 진나라때에는 상당구에 속하였다. 한나라때에는 날씨현을 세우고 진나라는 날씨현을 분할하여 무향현을 설치하였으며 유사가 거기에 속하였다.수나라 개황16년에 무향현을 분할하여 유사현을 세웠다.
 

좌권현
 

춘추시대에는 진나라에 속하였는데 전국시대에는 먼저 한나라에 속했다가 후에 조나라에 속하게 되였다.진나라때에는 상당군에 속하였고 서한시기에는 날씨현에 속하였다.동한말년에는 노하수(청장하서원)가 흐른다고 하여 처음으로 노하현을 세워 상당군에 속하게 되였다.서진시기에는 노양현으로 이름이 바뀌고 낙평군에 속하였다.북위태평진군9년(448년)에는 현향이 편입되였고 효창2년(526년)에 다시 현을 설치하고 요양이라고 개명하였다.북제시기에는 양유현(지금의 화순현)에 편입되였고 수나라 개황10년(590년)에 현서북에 있는 요산을 따서 요산현으로 바꾸었다.1942년9월18일 요현 마전에서 장렬히 희생된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장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요현을 좌권현이라고 개명하였다.
 

화순현
 

북제시기에 양유현을 세웠는데 경내에 양수하가 흐른다고 하여 지어진 것이다.수나라 개황10년(590년)에 화순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현성 동북에 화순의 고성이 있다고 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화순”이라는 뜻은 석륵과 이양이 구마지를 쟁탈하다가 후에 화해한 이석이야기로 부터 온 것이다.석륵은 황제로 된 후 민심을 얻기 위하여 인재를 중시하면서 특히 고향의 친지들과 친구들을 양국으로 청하였는데 여러번이나 겨루었던 이양이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이양은 장사로구나,어찌하여 오지 않았는가?구마는 평민때의 원한이고 나는 앞으로 인재를 모아야 하는데 어찌 아직도 평민백성을 원수로 보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이양은 이말을 듣고 인차 와서 용서를 빌었더니 석륵은 웃으면서 “전에는 경의 주먹을 싫어하였지만 경 역시 나의 독한 손맛을 봤었지”라고 말했다.후에 이양에게 주택을 하사하고 종군도위로 섬기게 하였다. “화순”이라는 이 이름은 석륵이 나라를 다스리는 계획과 책략에 있어서 적극적인 평가를 받았다.
 

석양현
 

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는데 서한때 점현을 세웠고 금나라 대정2년(1162년)에 평정주를 설립하였다.1914년에는 석양현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원화군현지”에는 “석양고성 일명 석양성”이라고 기재되였다. “이아”의 기재에는 “산서는 서양이고 산동은 조양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석양”은 태행산서쪽에 있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수양현
 

서진태강년간에 수양을 세웠는데 땅이 “장수지양”에 있다고 하여 지어진 것이며 낙평군에 속하였다.북위 태평진군9년(448년)에 수양은 대릉성(지금의 문수현)에 옮기였고 수(受)현이라고 개명하였다.수나라 개황10년(590년)에 수양고성은 다시 수양현을 설치하고 병주에 속하게 하였다.당나라 무덕6년(623년)에 수주에 현성을 설치하고 수양현이 속하게 하였다.정관8년(634년)에 수(受)주를 폐지하고 여전히 병주에 속해 있었으며 정관11년(637년)에 수(受)양을 수(壽)양으로 고쳤다.

 

려량시
 

려량은 려량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전경내를 관통한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것이다.시구역안의 골척산은 옛날에 려량산이라고 불렀다.만력 《분주부지》의 기재에 의하면 “려량산,일명 골척산,……태산은 왼쪽,화산은 오른쪽,상산에 기대고 고산에 안겨 형산을 마주하고 있다.이산은 궁륭이 중간에 있고 천지의 골척… … ”이라고 씌여져 있다.골척의 옛날 뜻은 려량과 동일하기에 려량산은 여기에서 따다 지은 이름이다.현재 1개 구 2개 시 10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교성현
 

서주때 북당에 속하였고 호씨융지였다.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서북산구는 호씨의 식읍이였다.동남평천은 기씨의 밭이였고 진경공12년(기원전514년)에 평릉현을 경내 대릉촌일대에 설치하였으며 평릉에 속하게 하였다.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으며 서부의 땅은 대릉현에,동부의 땅은 진양현에 속하였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진양,문수의 땅을 나누어 교성현을 세웠는데 분하와 공하 두개강이 합치는곳에 있다고 하여 이름지어졌다.당나라 무후천수2년(691년)에 현을 산남각파촌으로 옮겨 통치하였다.


문수현


춘추시기에 진국의 기씨밭이였으며 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는 대릉읍이였다.서한 왕망시기에는 대녕현이라고 개명하였는데 동한시대에 와서 대릉현으로 회복하였다. 북위태평진군9년(448년)에 수양현(서수양이라고도 부른다)이라고 고쳤다.수나라 개황10년(590년)에 경내의 문곡수는 물결이 파도쳤는데 여기로부터 문수현이라는 이름을 처음 고치게 되였다.당나라 무측천이 황제일때 그의 고향인 문수현을 무흥현이라고 개명하고 당나라 신룡원년에 다시 문수현으로 회복하였다.

 

분양시


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으며 과연현 땅이였다.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하였고 자씨땅이였다.삼국시기 위 황초2년(221년)에 자씨현은 서하군 관할로 되였고 군소재지를 자씨고성에 설치하였다.서진시기 서하군을 서하국으로 개편하였고 자씨현을 습성현으로 고쳤으며 북위 태화12년(448년)에 분주를 설립하여 습성현을 관할하게 하였고 당나라 상원원년(760년)에 습성현을 서하현으로 고치였다.당나라 말기,오대,송,금,원,명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명나라 만력23년(1595년)에 분양현을 설치하였다.분양현경계가 분하지양(서)에 이르렀고 송나라 금나라 2나라가 모두 서하현에서 분양군으로 주둔하였던 것에 근거하여 이름을 지었다.1996년8월에 분양시로 개편되였다.


효의시
 

전국시대 위나라에 속하였고 진나라 시기에는 태원군에 속하였으며 자씨현의 땅이였다. 삼국시기 위초원년에 중양현으로 옮겼고 병주서하군에 속하였다.서진시기 영가원년에는 병주서하군습하현에 속하게 되였고 북위때에는 영안현을 설치하였다.당나라 정관원년(627년)에는 현에 있는 효자 정흥이라는 사람이 “할고봉모”(자신의 살점을 베어내여 어머니에게 드린)효행이 조정과 재야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당태종은 조서를 내려 영안현을 효의현으로 개명하였다.1992년2월 효의시로 개편되였다.
 

교구현
 

교구현은 1971년4월에 건립되였는데 습현에서 교구,석구,천구,강성과 영석현에서 회룡,쌍지 그리고 효의현에서 대맥교,단소,온천 등 9개공사를 떼어내여 이루어 졌다.현소재지가 교구진에 있기에 양산남북교통의 길목이라는 뜻으로 교구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석루현
 

은상시기에는 지국에 속하였고 춘추시대에는 굴지에 속하였다.서한때에는 토군현을 세웠고 서하군에 속하였으며 동한초에 토군현을 폐지하였다.북위태평진군9년(448년)에 욕서현을 세웠고 토경군이 다스렸다.태화21년(497년)에 토경현으로 개명하였고 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석루현이라고 바꾸었다.현의 동쪽에 통천산(현재의 석루산)이 있었기에 “석접여루”에서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유림현
 

1971년7월 이석현 서부,중양현서부에서 각각 부분적으로 공사를 떼어내여 유림현을 건립하였다.현성이 유림진에 있다고 하여 이름을 짓게 되였으며 버드나무가 숲을 이룬다는 뜻에서 온 것이다.
 

중양현


전국시기에 처음으로 중양읍이라고 불리웠는데 조나라에 속하였다.서한시기에 중양현을 설립하고  “한낮의 태양,여일중천”의 뜻에서 따온 것이다.동한말 이석현과 합병되였고 북주 대상원년(579년)에 녕향과 평이 2개현을 나누어 설치하였으며 이석군에 속하였다. 수나라시기에는 평이현으로 합병하였고 이석군에 속하게 하였다.당나라때에는 석주에 속하였고 송나라때에는 태원군에 속하였다.금나라 태화년간에 녕향현이라고 개명하였으며 1914년에는 중양현으로 되였다.
 

이석구
 

전해지는 바 고대에 운석이 현경내에 떨어졌다고 하여 이석이라고 지었다.또 다른 설에 의하면 현의 동북쪽에 이석수가 있다고 하여 이름지어졌다고 한다.전국시대에는 조나라의 이석읍이였고 서한시기에는 이석현이였다
 

방산현
 

서한시기에 고랑현을 세웠고 북제 문선제시기에 양천현을 세웠다.수나라 대업3년(607년)에 방산진으로 옮겼고 방산현이라고 개명하였는데 성이 방산아래에 있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람현
 

경내에 가람산이 있다고 하여 이름지어졌으며 북위초에는 수용의 땅이였고 말년에는 고환이 수용을 멸하고 그땅에 람주를 설립하였다.수나라는 람성현을 세우고 누번군에 속하게 하였으며 당나라때에는 의방현으로 개명하고 람주에 속하게 하였다.오대,송,금,원나라때는 줄곧 변함없었다.명조홍무2년(1369년)에 람주는 람현 즉 주에서 현으로 되였다.
 

임현
 

하조때 기주에 속하였고 주조때에는 조나라땅에 예속되였다.서한때에는 임수현을 설립하였고 경내에 있는 추수하(옛적에는 능수라고 불렀다)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북주대상원년(579년)에 오돌군과 오돌현을 설립하였고 수나라 개황원년(581년)에 오돌군을 태화군으로 ,오돌현은 태화현으로 고쳤다.개황3년에 군을 폐지하였다.당나라 무덕3년(620년)에 태화현은 임천현으로 개명되였고 금나라 천회원년(1123년)에 임천은 임수로 바뀌였다.원세조지원3년(1266년)에 임주를 설립하였고 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임주를 폐지하고 임현으로 고쳤다.
 

흥현
 

북제 천보원년(550년)에 위분현을 세웠고 후에 임천현,임진현,합하현으로 여러차례 개명되였다가 금나라 흥정2년(1218년)에 진양공 곽문진이 “이곳은 빈하와 잇닿아 땅이 중요하고 백성들이 많아 합하현을 흥주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흥성”의 뜻을 취하여 지었다.명나라 홍무2년(1369년)에 흥주는 흥현으로 개편되였다.

 

장치시
 

옛날 장치시는 상당이라고 불리웠다.그것은 태행산꼭대기와 지형이 최고로 높아 하늘과 친구한다고 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전국시기에 한나라가 처음으로 상당군을 세웠는데 남북조시기에 이르러 노주로 바꾸었다.그후 명나라 가경8년(1529년)에 다시 노안부로 바뀌였고 장치현을 세웠으며 “사회질서가 장기간 안정되고 태평스럽다”는 뜻을 취하여 지어진 것이다.장치현은 현재 2개 구 1개 시 10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장치시시내성구

 

1946년에 장치시를 건립하였고 1950년에 공광구로 개편하였으며 1952년에 재차 장치시로 바꾸었다.1975년 장치시는 성할시로 됨과 동시에 시내와 교외 두 구역을 설립하였다.1976년에 시내구역은 정식으로 현급구로 설립되였다.
 

 

장치시교외구역

 

1946년에 장치시를 건립하였고 1950년에 공광구로 개편하였으며 1952년에 재차 장치시로 바꾸었다.1975년 장치시는 성할시로 됨과 동시에 시내와 교외 두 구역을 설립하였다.1976년에 교외구역은 정식으로 현급구로 설립되였다.


장치현

 

춘추시대에는 적적 노씨의 땅이였는데 진에 속했다.전국시기에는 韓나라의  별도로서 상당군에 속하였고 漢나라시기에는 호관땅이였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호관을 떼어 상당현을 세웠다.명나라 가경8년(1529년)에 노주는 노안부로 승격하였고 부곽으로 장치현을 설립하였는데 “사회질서가 장기간 안정되고 태평스럽다”는 뜻이다.
 

노성시

 

황제시대 염제의 후손인 참노가 지금의 노성일대를 수봉하였고 노국을 건립하였다.상나라 무정황제이후 상왕조는 서북부의 귀방,토방 등 이웃나라와 자주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나라들은 모두 산서남부에 분포되여 있었다.그중 귀방의 한개 갈래가 서락귀융인데 현재의 노성일대에서 활동하였다.선진사 전문가는 “낙(落)”이 곧 “노”라고 하며 潞국의 노의 뜻 유래라고 하였다.상나라는 위자봉지에 속하며 위자국이라고 부르고 서주는 노라고 불렀는데 춘추시대에는 노자영아국이였다.漢나라는 노(潞)현을 설립하였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노성현을설립하였고 당나라 천우2년(905년)에 노자현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5대시기에 다시 노성현이라고 부르게 되였고 1994년에는 현을 취소하고 시로 되였다.


둔류현
 


주조에서 시작되였는데 둔류동부는 류우라고 불리웠고 서부는 서오씨(徐吾氏)의 땅이였다.춘추시대에 류우,서오는 모두 진(晉)나라에 합병되였고 류우는 순류라고도 불리웠다.전국시대에 순류는 다시 둔류로 불리우고 서오는 여오로 바뀌였으며 모두 한나라에 속한다.한나라는 둔류,여오 2개 현을 세웠고 동한때에는 여오를 둔류와 합병하였다.


장자현

 

전해지는데 의하면 고대요황제의 장자인 단주의 봉읍이라고 하여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진한 2조대는 장자현을 세웠고 수나라 개황9년(589년)에 기씨현으로 개명하였다가 개황18년(598)년에 다시 장자현으로 바꾸었다.
 

호관현

 

현성의 북쪽에는 백곡산(지금의 노정산)이 있고 남쪽에는 쌍룡산이 있는데 두산이 양면에 우뚝 솟아 중간이 텅 빈것처럼 형세가 항아리 같았고 호구를 관문으로 하였기에 “호관”이라고 이름짓게 되였다.서한고제원년(기원전206년)에 호관현을 설치하였다. 
 

평순현

 

명나라때 청양리라고 불렀으며 노성현에 속하였다.가정3년(1524년)에 진경의 농민무장혁명이 폭발하였고 사태를 평정한 후 청양리농민들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가정8년(1529년)에 여성,노성,호관의 땅 “31리”를 떼여 진경무장혁명이 일어났던 중심인 청양리에 현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하기에 “모반자를 평정하고 사람들의 의향에 따른다”는 뜻으로 “평순현”이라고 지었다.
 

여성현

 

춘추시대에는 여후국이였다.한,삼국,2진시기에는 노현의 땅이였다.북위시기 태평진군11년(450년)에 노성현을 취소하고 예릉현을 세웠고 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여성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양원현

 

전국시기 조양자가 성을 쌓은것으로부터 이름을 얻었다.서한시기에 양원현을 설립하였고 북위시기에는 양원군이라고 하였다.북주건덕6년(577년)에는 양원군을 한주라고 바꾸었으므로 “고한”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무향현

 

경내에 무산과 무향수가 있는 것으로부터 이름을 짓게 되였다.서한시기에 날씨현을 세웠고 동한때 날현으로 바꾸었다.서진황제 진무의 태시년간에  날현을 무향과 노양,날 3개현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바로 무향현 이름의 첫시작이다. 
 

심현

 

춘추시기 현경계에는 적적이 살았고 한나라때부터 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수나라개황16년(596년)에 심주를 세웠는데 심하가 심주경내에 있다고 하여 이름을 얻게 되였다.명나라 홍무년간에는 심주가 무향,심원 2현을 거느렸고 청나라에서 명나라제도를 답습하여 여전히 심주라고 불렀다.1911년 주를 취소하고 현으로 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부터 따서 처음으로 심현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심원현

 

서한시기 처음으로 현을 설치하고 통치하였는데 이름은 곡원현이였고 상당군에 속하였다. 신망시기에 곡근현이라 바꾸었고 동한시기에 다시 곡원현으로 되였다.북위효장제 건의 원년(528년)에는 심하가 현경계북부의 이랑신구에서 발원한다고 하여 심원현이라고 이름을 정하였다.

 

진성시
 

옛날에는 택주라고  불렀으며 주나라때에는 진나라땅이였다.기원전376년에 위,조,한 3개 씨족이 진나라를 분할하고 진정공의 단씨를 탈취하였으며 고도를 봉지로 떼어 주었다.진성은 진나라 군주봉지라는뜻에서 이름을 얻게 되였다.1983년에 진성현은 진성시(현급)로 개편되였고 1985년에 진동남지구를 취소하고 진성시는 지급시로 승격하였으며 1개 구 1개 시 4개 현을 관할한다.
 

 

 

진성시성구


1985년에 진성시는 지급시로 승격되였으며 원래 관할구역을 시내구역과 교외구역(지금의 택주현)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이 바로 도시설립의 시작인 것이다.


택주현
 

진한시대에 고두현,양아현,고두군을 세우고 북위때에는 건주에 속하였다.수나라 개황3년(583년)에 건주가 획택하옆이라고 하여 택주라고 바꾸었다.당나라 무덕3년(620년)에 진성현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후에 여러번이나 바뀌였으며 진성,단주라고도 불리웠다.1985년에 진성시는 지급시로 승격되였고 원래 관할구역을 시내구역과 교외구역으로 나누었으며 1996년에 교외구역을 취소하고 택주현이라고 개편하였다.
 

고평시
 

북위영안2년(529년)에 고평현을 세웠는데 경내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부가 평지였기에 이로부터 이름을 따왔다.북제천보7년(556년)에 고평현을 평고현으로 개명하였다가 북제말년에 고평현으로 회복되였으며 1994년에 현을 취소하고 시로 개편되였다.
 

양성현
 

옛날에 확택이라고 불리웠고 당나라 천보원년(742년)에 확택현을 양성현이라고 바꾸었으며 현성소재지 양릉역이 양아고성이라고 하여 이름을 얻게 되였다.아양고성은 남쪽으로 학산에 이르고 지세가 높고 험준하였다.《이아(尔雅)•석지(释地)》에 이르기를 양천의 물이 이곳을 흘러간다고 하여 양하 혹은 양릉이라고 불렀다.
 

능천현
 

주나라때에 晉나라에 속하였고 秦나라시기에는 상당군에 속하였다.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고평지를 분할하여 능천현을 세웠는데 산천이름에서 따온 것이다.원세조부터 원나라3년(1266년)에 이르기까지 진성현에 합병되였고 원나라31년(1294년)에 능천현을 다시 회복하였다.
 

심수현
 

진한시기에 단씨현을 세웠고 북제시기에 영녕현이라고 개명하였다. 수나라개황18년(598년)에 심수현이라고 바꾸어 불렀는데 그것은 경내에 심하가 관통한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임분시
 

북위시기에 지금의 임분시에 “백마성”을 건립하였고 평양현을 이곳으로 옮겼다.수나라 개황3년(583년)에 수문제 양견은 “평陽”과 “평楊”이 같은 발음이라고 하여 평양현을 임분현이라고 개명하였으며 “빈림분하”에서 그뜻을 가져왔다.1971년에 이곳에 임분시를 설립하였고 2001년에 지급임분시로 되여 1개 구 2개 시 14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요도구


요도구는 전해져 내려오는 다섯황제중의 하나인 문명의 시조황제 요도당씨에 의하여 건설된 것이며 수도를 건립한 곳이다.춘추시대에 진나라는 평양현을 설치하였고 秦,한,위,晉시대를 거치면서도 바꾸지 않았다.2001년에 지급임분시를 설립할때 현급임분시를 요도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요도평양”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후마시


옛날에는 “신전”이라고 불렀으며 춘추시대에는 진국의 수도였다.진,한나라는 강현을 설립하였고 유방은 이곳을 강후로 주발에게 봉지로 주었다.동한,위,2개 진은 강읍현을 설립하였고 명나라 홍무8년(1375년)에 강주의 금합역을 “하마리”역전으로 바꿀때 “하마”를 기피하여 “하”가 당지에서 지방언어로 “후”라고 읽는다고 하여 역전을 등록할때 “후마역”이라고 하였다.후마는 이때로부터 정식지명으로 되였다.1958년에 곡옥,신강,분성을 합병하여 후마시를 세웠으며 1962년에는 시를 취소하고 곡옥현으로 다시 개명하였다.1971년에 후마시를 다시 회복하였다.
 

곽부시
 

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곽읍현이라고 고쳤으며 금나라 정우3년(1215년)에 곽주를 세웠는데 경내에 곽태산이 있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1912년에 강주를 현으로 하고 처음으로 곽현이라고 부르게 되였다.1990년 현을 폐지하고 시로 개편하였으며 곽주시라고 불렀다.
 

곡옥현
 

곡옥현의 이름은 서주초기부터 있었는데 “옥천”(지금의 경명폭포)에서 나와 구곡이 북으로 회하에 흘러들고 빙빙 맴돌다가 서쪽으로 분하에 흘러들어간다고 하여 곡옥이라고 지었다.주평왕26년(기원전745년)에 진소후는 성사(환숙)에게 이곳을 봉지로 주었고 호를“옥국”이라고 하였다.서한시기에 강현을 세웠고 동한때에는 강읍현이라고 개편하였으며 북위 태화11년(487년)에 강읍현을 폐지하고 곡옥현이라고 하였다.


익성현


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고익성이라는 이름이였다.고익성은 지금의 남량상고산아래의 고성촌으로 산지형이 날개 펼친 새와 같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것이다.


부산현


당나라 무덕2년(619년)에 부산현을 설립하였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요순시대에 홍수가 넘쳐흘렀는데 산이 물을 따라 높았다 낮았다 하여 마치 떠다니는 듯하다고 하여 “부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양분현
 

양릉,분성 2개 현은 1954년9월에 합병되여 양분현이 설립되였다.원래의 양릉현경내에 진양공의 능묘가 있다고 하여 얻어진 이름이며 분성은 분하해안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이름을 얻었다.


홍동현
 

원래는 춘추시대 진나라에서 세운 양씨현이였는데 후에 양현으로 바꾸었다.수나라 의녕원년(617년)에 이원이 수나라 대권을 장악한후 수나라 “양”성을 기피하여 양현을 홍동현이라고 바꾸었다.현지기재에 의하면 성남에는 고대전설중의 신선 홍애가 살었던 “홍애고동”이 있는 것에서 유래되였다고 한다.
 

안택현
 

서한시기에는 의(陭)씨현이라고 불렀는데 동한시기에 와서 의(猗)씨로 바꾸었다.북위 건의원년(528년)에 의씨를 기씨로 바꾸었고 서부(지금의 고현경)에 안택현을 세웠다.당시 현소재지가 안길,택천사이에 있다고 하여 두곳의 첫글자를 따서 이름지었다.


고현
 

고현은 고대의 악양이며 원래 북위건의원년(526년)에 세운 안택현이다.수나라 대업2년에 악양현으로 바꾸었고 1914년에 악양현을 안택현이라고 바꾸었다.1971년에 안택현서부의 7개 공사와 부산현 북부의 3개 공사를 떼어내여 현을 세우고 “악양”이라는 현이름(호남성에 이미악양시가 있었음)을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여 고현이라고 이름지었다.
 

분서현


북제가 이곳에서 분수군 및 분수현을 세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을 폐지하였다.수나라 개황18년(598년)에 임분현을 분서현으로 바꾸었는데 분하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이름짓게 되였다.
 

포현
 

옛날에는 포자국이라고 불렀는데 당제요의 태사 포이자가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하여 이름지은 것이다.은상시기에는 “기방후국”이라고 불리웠고 춘추시대에는 진국포읍에 속하였다.한나라때는 포자현의 땅이였고 동진 태원11년(386년)에 정양현을 세웠다.북위태화21년(497년)에 정양현을 석성현이라고 바꾸었고 북주 대상원년(579년)에는 포자현으로 회복하였으며 수나라 대업원년(605년)에 포현으로 바뀌였다.
 

향녕현


북위때 창녕현,평창현을 설립하였고 당나라 시기에 평창을 창녕에 편입시켰으며 4대후당 동광원년(923년)에 당장종 이존욱의 조부 이국창 존명을 기피하여 창녕현을 향녕현으로 바꾸었다.


길현
 

춘추시대에 진국의 굴읍이였는데 북굴이라고도 불리웠다.진나라는 북거현을 세웠고 북위는 이곳의 정양현을 정양군으로 하였다.수나라 양견은 “정陽”과 “정楊”이 발음이 같은 것을 기피하여 정양(陽)군을 문성군으로,정양(楊)현을 길창현으로 바꾸었다.금나라때에는 길창현을 길주로 개명하였고 1912년에 주를 폐지하고 길현을 설립하였다.


대녕현
 

옛날에 속수현이라고 불리웠다.당지의 부윤은 귀화현(지금의 영화현)과 경계분쟁으로 무력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피면하기 위하여 두개 현이 영원히 화목하라는 의미에서 속수현을 대녕현이라고 개명하였다.
현수나라 개황5년(585년)에 습주라고 불렀다.당나라 “원화군현지”의 기재에 의하면


영화현


옛날에 귀화현이라고 불렀다.당지의 부윤은 속수현(지금의 대녕현)과 경계분쟁으로 무력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피면하기 위하여 두개 현이 영원히 화목하라는 의미에서 귀화현을 영화현이라고 개명하였다.
“《이아•석지》왈: ‘하습위습’.주대천박하습,고로 습위명”이라고 하였다.1912년에 습주를 습현으로 불렀다.

 

운성시


운성은 “염운지성”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되였다.춘추시대에 진나라에 속하였고 한,조,위3개씨족이 진나라를 분할한 후 운성은 위나라에 속하게 되였다.진시황은 36군을 설립하였는데  운성은 하동군에 속하였으며 줄곧 하동이라고 불리웠다.1949년에 운성전서를 설립하였고 1954년에 운성과 임분 2개 전구를 합병하여 진남전구라고 하였다.1970년에 진남지구를 철회하고 다시 운성지구를 설립하였다.2000년에 지급운성시로 개편되였으며 현재 1개 구 2개 시 10개 현을 관할하고 있다.
 


 

 

염호구


1950년에 운성전구에서 운성을 다스렸다.1954년에 운성전구를 철회하고 진남전구에 속하게 하였다.1954년7월에 해현과 우향을 합병하여 해우현을 설립하였다.1955년7월 운성진은 안읍현에 편입되였으며 1958년11월에 안읍,해우,임의를 합병하여 운성현을 설립하였다.1960년1월부터 1961년7월까지 임의,영제현,원해현,안읍을 각각 분리하였으며 여전히 운성현이라고 하였다.1983년에 운성현은 운성시로 개편되였고 2000년에는 운성시를 염호구라고 고쳤는데 이것은 경내에 있는 염지로부터 “염호”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영제시


영제는 예전에 포판이라고 불렀다.진나라에서 포판현을 설립하였고 청나라 옹정6년(1728년)에 포주를 부로 승격시켰고 부곽을 영제현에 설립하였다.현의 이름은 경내에 명나라 수리공정인 영제거로부터 따온 것이다.
 

하진시
 

전국시기에 위나라의 피씨읍이였고 진나라에서 피씨현을 설립하였다.왕망천봉원년(14년)에 연평현으로 고쳤고 동한때에 피씨현이라고 다시 불렀으며 북위태평진군7년(446년)에 용문현으로 고쳤다.송나라 선화2년(1120년)에 하진현이라고 개명하였는데 경내에 황하의 우문나루터가 있는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1944년에는 현을 폐지하고 시를 설립하였다.
 

임의현
 

임의현은 1954년에 세워진 것이다.임씨,의씨 2개 현이 합병하여 각각 첫글자를 따서 이름지은 것이다. “임진”일명의 유래에 대하여 해석이 있다.춘추시대에 진나라가 황하 서안에 성보를 건축하고 “이림진국”이라고 한데서 임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였다.다른 한가지는 이곳이 춘추시기에 진양이라고 불리웠고 당나라시기에 진성이라고 불리웠다 하여 임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임의”일명도 유래가 있는데 하조때 고의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노사》에서 말하기를 “하유의국” 한나라에서 의씨현을 세웠다고 한다.
 

만영현


만영현은 만천,융합 2개현이 합병되여 각각 첫글자를 따서 이름지은 것이다.만천은 “성림산간,지다용천”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되였다.당나라 무덕3년(620년)에 직한,안읍,의씨,분음,용문 5개현의 땅을 떼어내여 만영현을 설립하였다.영하는 서주의 경지였고 개원10년(722년)에 후토사를 수리한후 고정을 얻었고 보정현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송 대중상부4년(1011년)에 영하가 흘러넘쳤는데 사람들은 이를 상서롭다고 여기고 영하현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1954년에 만천,영하 2개 현은 합병되였다.
 

직산현


상주시기에 직이라고 불렀다.춘추시기에는 진나라에 속하였고 청원이라고 불렀다.전국시대에는 위나라에 속하였다가 후에 조나라에 속하게 되였다.진나라때에는 하동군에 속하였고 서한때에는 분하를 경계로 분남은 좌읍현(지금의 문희)에,분북부분은 장수현(지금의 신강)에 속하였다.동한때 분북은 피씨(지금의 하진)와 합병되였고 분남부분은 문희현에 합병되여 직산정을 세웠다.북위초에 용문군에 속하였고 태화11년(487년)에 고량군을 설치하고 고량현을 설립하였다.수나라 개황2년(582년)에 강주를 정평으로 옮기였고 분북에 현성을 건축하였는데 경내에 직왕산이 있는것으로부터 직산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강현
 

북위등국원년(386년)에 태평현이라고 불렀고 수나라 개황3년(538년)에 정평현을 설립하였다. 대업2년(606년)에 강주로 바꾸었는데 정평,익성,곡옥,직산,용문,원곡,태평,강현 등 8개 현을 이끌었다.1912년에 주를 폐지하고 신강현이라고 불렀는데 “함여유신”이라는 뜻에서 이름지은것으로 강현과 서로 구별하게 새로운 강현이라고 하여 신강현이라는 이름이 시작되였다.
 

강현
 

경내에 강산이 있는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되였다.춘추시기에 “차상성”을 세웠다. 주혜왕8년(기원전669년)에 진헌공이 대부를 파견하여 성을 쌓아 취를 건설하였고 수많은  공자들을 모조리 살해하였으며 차상성을 처음으로 강이라고 명명하였다.그후부터 강을 도읍으로 정하였다.한,조,위 삼국이 진나라를 분할한 후 강은 위나라에 속하였다.진나라때는 하동군에 속하였고 서한때에는 강의 땅을 확장하여 곡옥,익성을 강현으로 합병하였다.북위태화18년(494년)에 강산을 변계로 남강현을 설치하였고 서위대통5년(539년)에는 남강현을 강현이라고 고쳐 불렀다.
 

원곡현
 

경내에 군산이 담과 같았고 또 이곳에 있는 구곡황하강반이라고 하여 이름을 지었다.상,주시기에는 “긍방”이였고 후국의 땅이였다.춘추시기에는 진나라에 속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위나라에 속하였으며 진나라때에는 하동군에 속하였다.한나라에서 원현을 설치하였고 남북주는 한때 백수현,호성현 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송대에는 원곡현이라고 바꾸었는데 이때로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문희현
 

진나라때에는 좌읍현이라고 불렀다.서한원정6년(기원전111년)에 무제 류철은 하남구씨에 순행을 나갔는데 도중에 좌읍의 동향을 지날때 남월(남월국-지금의 광동,광서일대)을 돌파하였다는 기쁜소식을 듣게 되였다.그리하여 즉시 동향을 문희현이라고 바꾸게 되였다.

 

하현
 

고대에는 안읍의 땅이였는데 하우의 옛도읍으로부터 이름을 짓게 되였다.4500년전 대우는 이곳에 도읍을 건립하였다.대우는 치수에 공을 세운것으로부터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였고 국호를 하라고 하였다.하는 익주에 속하며 후국의 땅이였고 주는 진국의 땅이였다.북위태화18년(494년)에 하현을 설치하였다.
 

평륙현
 

하나라때 우라고 불렀다.주나라초 무왕은 중옹의 후손에게 이곳을 봉지로 주었고 국호를 여전히 우라고 하였다.춘추시기에는 진나라에 속하였고 태양읍이라고 하였다.한나라때 처음으로 태양현을 설치하였고 태양현이라고도 불렀다.북주태화2년(567년)에 하북현이라고 고쳐 불렀고 당나라 천보원년(724년)에 협군태수 이제물이 삼문조길에서 고대칼을 얻었는데  칼날에 해서체문으로 “평륙”이라고 씌여있는 것을 보고 상서롭다고 여기여 현의 이름으로 짓게 하였다.
 

예성현


서주초 무왕은 희성자제에게 이곳을 봉지로 주었고 위국이라고 불렀다.진헌공은 위나라를 멸망시킨 후 대부 예필만에게 이곳을 봉지로 주었고 이름을 예성 또는 위성이라고 하였다.한나라때에 하북현을 설치하였고 서위때에 지금의 현동쪽경계에 안융현을 설치하였다.북주명제2년(558년)에는 예성현을 건립하였고 당나라 무덕2년(619년)에 예주를 설립하였으며 예성,영락현을 관할하게 하였다.명나라 청나라시기에는 줄곧 예성현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