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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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문하


황하는 청해성 바옌카라산북쪽기슭에서 발원하여 굽이굽이 돌고돌아 동으로 흘러간다.진서대협곡을 거쳐 분위황토고원지구를 지나 남으로 동관에 이름으로써 “위수가 서에서 내려와 여기로 흘러든다”고 하였으며  이곳에서 황하의 위대한 “구곡”을 이루었다.형세를 놓고 말한다면 북으로는 하동대평원,서로는 관중평원, 동으로는 중원대지를 누비는데 그 산과 강의 험준함은 더욱 황화를 강인하게 만들었다.자고로 이 일대를 “천하의 중심”, “중원의 어깨”라고 불렀다.중국역사상 황하중류와 그 연안 지구에서 형성된 황하문화는 인류문명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고 황하류역은 우리나라 고대인류의 발상지로서 중화민족의 가장 주요한 발상지가운데 하나이다.황하와 황하정신은 중화민족을 배육해냈으며 우리들에게 근로용감하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하였으며 포용하는 마음과 불요불굴의 정신을 알게 하였다.황하치수개발에서 이룩한 거대한 성취는 우리들로 하여금 격앙된 투지로 분투노력하도록 격려하였으며 서로 단결하고 현실적이며 개척분투 헌신하는 황화의 정신을 따라배워 중화민족 아들딸로 하여금 일심단결하여 용감히 도전하고 초월하는 백절불굴의 민족정신을 연마하게 하였다.때문에 황하는 웅위로운 만리장성과 함께 우리 중화민족의 상징으로 되였다.


원고시기에 황하중하류지역은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충족하여 원시인류의 생존에 적합하였다.황토고원과 황하는 충적평원으로서 그 토질이 푸석하여 개간과 생산에 유리하였고 원시농목축업발전에 적합하였다.황토의 특성은 선조들이 동굴을 파고 집거하는데 편리를 가져다주었다.특수한 자연지리환경은 우리나라 고대문명의 발육에 비교적 좋은 조건을 지어주었다.산서경내에서 발굴된 고인류문화유적은 전국으뜸으로서 구석기 조기와 중기 말기 세시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산서의 예성서후도유적은 지금으로부터 180만년전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인류문화유적지이다.산서양분정촌유적은 지금으로부터  5-10만년전의것으로 우리나라 구석기중기의 전형적유적이다.산서 양고현 허가요문화유적은 약 10만년전의 것으로 구석기시대 고대인류화석과 문화유적이 제일 풍부하고 규모가 가장 큰 유적의 하나이다.산서경내에서 또 대량의 신석기시대의 앙소문화와 룡산문화시기의 문화유적이 발견되였다. 신석기문화는 다원화구역성발전특점을 갖고 있는데 이는 우리중화민족공동체의 산생,분포와 상호관계의 역사를 제시하고 있다.로남,소북등지의 대문구문화는 문헌에서 말하는 동이민족집단이고,섬서,감숙,녕하일대의 마가요문화는 서융민족집단이며 호북강한평원의 굴가령문화는 남만민족집단이다.내몽고등지의 세석기를 위주로하는 신석기문화는 북적민족집단이며 산서 및 황하금삼각주지구의 앙소문화야말로 곧 화하민족문화의 주체라고 할수 있다.


황하는 부드럽고 강인하며 넓은 마음으로 황하문명의 선조들을 배육하였고 염황부족과 기타부족문명의 대융합을 이루게 하였기에 중화민족의 어머니강으로 되였다.황하의 수토는 찬란한 문명을 배육하였고 인류발전사의 한 과정으로 되였다.기원전 3천여년전 황제부락과 치우부락은 산서성 남부의 운성분지에서 중화민족문명역사상 최초의 대전을 일으켜 민족대융합의 서막을 열어 놓았다.고대사전문가들은 상고전설인물이 활동한 구역에 근거하여 황제, 염제,전우,제곡,요,순,우는 앙소문화와 진,섬,예의 용산산문화분포구에 위치한 화하민족집단에 속하고 치우,태호,소호는 동이민족집단에 속한다고 분석하였다.춘추시기에 이르러 두대민족집단은 이미 하나로 융합되여 당시 인수가 가장 많고 문화가 가장 발달되고 계급사회진입이 가장 빠른 화하족을 형성하였다.


이시기 전설중의 인물과 전쟁은 화하족과 각 씨족간의 지연관계의 건립과 융합합병의 과정을 반영하였으며  “우두안읍”에서 하왕조의 건립은 곧 화하족 형성의 표지라고 할수있다.“하”자의 본뜻은 “중토” “중국사람”을 일컬었는데 많은 역사문헌에서 알수 있듯이 고대인들의 심목중의 “중국”은 곧 기주 즉 지금의 하동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황하중심지역을 말한다.곽박주 “산해경”: “기주는 중토다”라고 기재되여 있다. “로사”왈:“중국을 총칭하여 기주라고 한다”.산서를 핵심으로 하는 황하금삼각주지구는 황하문화의 발상지로서 화하민족과 중국의 기원지로 일찌기 사책에 기재되였다.


산서황하류역은 인류문화가 집대성되고 오래동안 지속되여왔다.고대신화로부터 춘추시기 진나라 패업에 이르기까지, 전국,한,조,위나라의 진나라 분할시기로부터 산서 위,진,남북조의 민족융합에 이르기까지, 당조 이세민의 진앙거병으로부터 명청시대진상들의 휘황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역사시기에 중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은 줄곧 황하류역이였다.


일사천리로 표호하며 사품치는 황하의 장관은 중화의 아들딸들에게 조국강산에 대한 자긍심과 포부를 불러일으켰다.무수한 중화의 아들딸들은 황하를 대할때마다 그토록 인간의 미약함과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 숙이지 않을수 없게 된다.황하의 위대함에 위인 모택동마저도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모든것을 멸시할수 있어도 황하만은 멸시 못할것이다. 황하를 멸시하는것은 곧 우리민족에 대한 멸시이다… …”


황하는 우리에게 계발과 힘을 주는 중화민족정신의 상징이다. 황하정신은 애국주의를 핵심으로 중화민족 몇천년의 역사실천을 통해 휘황찬란한 문명성과와 풍부하고 전면적인 도덕규범을 나타냈으며 중화민족의 간고분투정신과 “자립자강과 강압을 두려워하지 않는” 반항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진섬변계의 황하연안에서 기세가 웅장한 호구폭포,오랜세월을 헤쳐나온 나루터,한시대를 풍미했던 황하고진은 모두 황하문화를 말해주고있다……
호구폭포는 해내외중화민족의 마음속에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산서뿐만아니라 황하전체에서 가장 보귀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황하의 거대한 물결은 천메터 하상에서 용솟음쳐나와 이삼십메터의 “용조” 호구로 번개같이 쏟아져 내려 호구폭포의 장관을 이룬다.아직도 호구폭포연안에서는 당시의 “마른땅에서 배를 저어”황하를 날아넘는 장거를 느낄수 있다.


“진상서대문,황하대부두”,중국동서부지구의 경제,문화중추였으며  “구곡황하제일진”의 미칭을 갖고있는 적구에서 당시의 휘황함을 아직도 심심찮게 찾아 볼수 있다.적구는 사상가의 전당으로서 유람객의 성지로 예술가의 요람으로 되였다.


나루터는 사람들이 대하를 뛰여넘는 초석으로서 황하와 상호 의존하며 세월을 지내왔다.강은 나루터를 만들었고 나루터는 황하에 생기를 가져다 주었다. 오늘날 산서경내의 황하에는 아직도 많은 나루터유적이 보존되여 있다.이를테면 서구고도, 적구도,우문도,포진도,오왕도,풍릉도,대우도,모진도 등 많은 나루터들은 모두 몇천년 동안 사용해온 옛 나루터이다. 오늘에 이르러 이를 빌려 관광자원을 개발하는것은 황하나루터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지대한 의의를 가진다.


풍후,대우,황하개원철우,황하기만,건곤만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기슭을 따라 올라가게 하며 만가채수리중추,대우도전관잠,소랑적저수지는 우리의 지혜를 인도한다.오늘의 황하는 무쇠날개를 펴며 당신의 광림을 기다리고 있으며 오늘의 산서는 현재 도약식 발전의 새로운 이념으로 전변하며 사면팔방,오호사해에서 오시는 손님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


황하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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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는 청해성 바옌카라산북쪽기슭에서 발원하여 굽이굽이 돌고돌아 동으로 흘러간다.진서대협곡을 거쳐 분위황토고원지구를 지나 남으로 동관에 이름으로써 “위수가 서에서 내려와 여기로 흘러든다”고 하였으며  이곳에서 황하의 위대한 “구곡”을 이루었다.형세를 놓고 말한다면 북으로는 하동대평원,서로는 관중평원, 동으로는 중원대지를 누비는데 그 산과 강의 험준함은 더욱 황화를 강인하게 만들었다.자고로 이 일대를 “천하의 중심”, “중원의 어깨”라고 불렀다.중국역사상 황하중류와 그 연안 지구에서 형성된 황하문화는 인류문명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고 황하류역은 우리나라 고대인류의 발상지로서 중화민족의 가장 주요한 발상지가운데 하나이다.황하와 황하정신은 중화민족을 배육해냈으며 우리들에게 근로용감하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게 하였으며 포용하는 마음과 불요불굴의 정신을 알게 하였다.황하치수개발에서 이룩한 거대한 성취는 우리들로 하여금 격앙된 투지로 분투노력하도록 격려하였으며 서로 단결하고 현실적이며 개척분투 헌신하는 황화의 정신을 따라배워 중화민족 아들딸로 하여금 일심단결하여 용감히 도전하고 초월하는 백절불굴의 민족정신을 연마하게 하였다.때문에 황하는 웅위로운 만리장성과 함께 우리 중화민족의 상징으로 되였다.


원고시기에 황하중하류지역은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이 충족하여 원시인류의 생존에 적합하였다.황토고원과 황하는 충적평원으로서 그 토질이 푸석하여 개간과 생산에 유리하였고 원시농목축업발전에 적합하였다.황토의 특성은 선조들이 동굴을 파고 집거하는데 편리를 가져다주었다.특수한 자연지리환경은 우리나라 고대문명의 발육에 비교적 좋은 조건을 지어주었다.산서경내에서 발굴된 고인류문화유적은 전국으뜸으로서 구석기 조기와 중기 말기 세시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산서의 예성서후도유적은 지금으로부터 180만년전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인류문화유적지이다.산서양분정촌유적은 지금으로부터  5-10만년전의것으로 우리나라 구석기중기의 전형적유적이다.산서 양고현 허가요문화유적은 약 10만년전의 것으로 구석기시대 고대인류화석과 문화유적이 제일 풍부하고 규모가 가장 큰 유적의 하나이다.산서경내에서 또 대량의 신석기시대의 앙소문화와 룡산문화시기의 문화유적이 발견되였다. 신석기문화는 다원화구역성발전특점을 갖고 있는데 이는 우리중화민족공동체의 산생,분포와 상호관계의 역사를 제시하고 있다.로남,소북등지의 대문구문화는 문헌에서 말하는 동이민족집단이고,섬서,감숙,녕하일대의 마가요문화는 서융민족집단이며 호북강한평원의 굴가령문화는 남만민족집단이다.내몽고등지의 세석기를 위주로하는 신석기문화는 북적민족집단이며 산서 및 황하금삼각주지구의 앙소문화야말로 곧 화하민족문화의 주체라고 할수 있다.


황하는 부드럽고 강인하며 넓은 마음으로 황하문명의 선조들을 배육하였고 염황부족과 기타부족문명의 대융합을 이루게 하였기에 중화민족의 어머니강으로 되였다.황하의 수토는 찬란한 문명을 배육하였고 인류발전사의 한 과정으로 되였다.기원전 3천여년전 황제부락과 치우부락은 산서성 남부의 운성분지에서 중화민족문명역사상 최초의 대전을 일으켜 민족대융합의 서막을 열어 놓았다.고대사전문가들은 상고전설인물이 활동한 구역에 근거하여 황제, 염제,전우,제곡,요,순,우는 앙소문화와 진,섬,예의 용산산문화분포구에 위치한 화하민족집단에 속하고 치우,태호,소호는 동이민족집단에 속한다고 분석하였다.춘추시기에 이르러 두대민족집단은 이미 하나로 융합되여 당시 인수가 가장 많고 문화가 가장 발달되고 계급사회진입이 가장 빠른 화하족을 형성하였다.


이시기 전설중의 인물과 전쟁은 화하족과 각 씨족간의 지연관계의 건립과 융합합병의 과정을 반영하였으며  “우두안읍”에서 하왕조의 건립은 곧 화하족 형성의 표지라고 할수있다.“하”자의 본뜻은 “중토” “중국사람”을 일컬었는데 많은 역사문헌에서 알수 있듯이 고대인들의 심목중의 “중국”은 곧 기주 즉 지금의 하동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황하중심지역을 말한다.곽박주 “산해경”: “기주는 중토다”라고 기재되여 있다. “로사”왈:“중국을 총칭하여 기주라고 한다”.산서를 핵심으로 하는 황하금삼각주지구는 황하문화의 발상지로서 화하민족과 중국의 기원지로 일찌기 사책에 기재되였다.


산서황하류역은 인류문화가 집대성되고 오래동안 지속되여왔다.고대신화로부터 춘추시기 진나라 패업에 이르기까지, 전국,한,조,위나라의 진나라 분할시기로부터 산서 위,진,남북조의 민족융합에 이르기까지, 당조 이세민의 진앙거병으로부터 명청시대진상들의 휘황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역사시기에 중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은 줄곧 황하류역이였다.


일사천리로 표호하며 사품치는 황하의 장관은 중화의 아들딸들에게 조국강산에 대한 자긍심과 포부를 불러일으켰다.무수한 중화의 아들딸들은 황하를 대할때마다 그토록 인간의 미약함과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 숙이지 않을수 없게 된다.황하의 위대함에 위인 모택동마저도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당신들이 모든것을 멸시할수 있어도 황하만은 멸시 못할것이다. 황하를 멸시하는것은 곧 우리민족에 대한 멸시이다… …”


황하는 우리에게 계발과 힘을 주는 중화민족정신의 상징이다. 황하정신은 애국주의를 핵심으로 중화민족 몇천년의 역사실천을 통해 휘황찬란한 문명성과와 풍부하고 전면적인 도덕규범을 나타냈으며 중화민족의 간고분투정신과 “자립자강과 강압을 두려워하지 않는” 반항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진섬변계의 황하연안에서 기세가 웅장한 호구폭포,오랜세월을 헤쳐나온 나루터,한시대를 풍미했던 황하고진은 모두 황하문화를 말해주고있다……
호구폭포는 해내외중화민족의 마음속에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산서뿐만아니라 황하전체에서 가장 보귀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황하의 거대한 물결은 천메터 하상에서 용솟음쳐나와 이삼십메터의 “용조” 호구로 번개같이 쏟아져 내려 호구폭포의 장관을 이룬다.아직도 호구폭포연안에서는 당시의 “마른땅에서 배를 저어”황하를 날아넘는 장거를 느낄수 있다.


“진상서대문,황하대부두”,중국동서부지구의 경제,문화중추였으며  “구곡황하제일진”의 미칭을 갖고있는 적구에서 당시의 휘황함을 아직도 심심찮게 찾아 볼수 있다.적구는 사상가의 전당으로서 유람객의 성지로 예술가의 요람으로 되였다.


나루터는 사람들이 대하를 뛰여넘는 초석으로서 황하와 상호 의존하며 세월을 지내왔다.강은 나루터를 만들었고 나루터는 황하에 생기를 가져다 주었다. 오늘날 산서경내의 황하에는 아직도 많은 나루터유적이 보존되여 있다.이를테면 서구고도, 적구도,우문도,포진도,오왕도,풍릉도,대우도,모진도 등 많은 나루터들은 모두 몇천년 동안 사용해온 옛 나루터이다. 오늘에 이르러 이를 빌려 관광자원을 개발하는것은 황하나루터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지대한 의의를 가진다.


풍후,대우,황하개원철우,황하기만,건곤만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기슭을 따라 올라가게 하며 만가채수리중추,대우도전관잠,소랑적저수지는 우리의 지혜를 인도한다.오늘의 황하는 무쇠날개를 펴며 당신의 광림을 기다리고 있으며 오늘의 산서는 현재 도약식 발전의 새로운 이념으로 전변하며 사면팔방,오호사해에서 오시는 손님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