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가

명인명가

 

一、염제


화하족의 선조, 호는 열산씨이고 력산씨라고도 부릅니다. 상고시대 강씨부족의 수령. 염제는 오곡을 심어 인민들의 식물로 하고, 쟁기를 만들어 밭을 갈고 김을 맸으며, 백초를 맛보아 인민들의 병을 치료하였고, 마를 천으로 하여 인민들의 추위를 덜어주었고, 기물을 만들어 인민들이 사용할수 있게 하였고, 오동나무를 깍아 거문고를 만들어 인민들이 즐거움을 누릴수 있게 하였으며, 낮에는 장사를 하여 인민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고, 나무가지를 깍아 화살을 만들어 인민들이 안거할수 있게 하고, 팔괘를 보아 천상을 연구하였으며, 남방을 순행하는 과정중에 인민들을 위하여 병을 치료하고 약을 캤고, 하루에 70여가지의 독을 접하였어도 포기하지 않았다가 겔세민을 잘못 맛보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인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첫부의 의학저작을「신농본초경」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산서성 고평시 신농진 장리촌에 위치한 염제릉은 바로 염제를 제사하기 위한 전문 장소입니다. 


二、황제(기원전 2717년 – 기원전 2599년)


헌원황제는 중화민족의 시조로서 “화하시조”로 높이 받들리고 있습니다. 중국 원고시대 부락 연맹의 수령. 소전의 아들, 본 성은 공손, 희수에 오래 거주하여 성을 희라고 고치고 헌원의 언덕에 살았기에 (오늘의 하남성 신정 서북쪽)호를 헌원씨라고 하였습니다. 출생, 창업과 건도를 모두 우유웅 (오늘의 하남성 신정)에서 했기에 또 우웅씨라고도 불리우고 토덕지단이 있기에 황제라 불리웠습니다. 그는 중화민족 통일이라는 위대한 업적으로 사서에 기재되였습니다. “수인에서 당, 여 홍수때까지 년도수는 명확치 않으나 적어도 수천년은 넘었을것이다. 그가 만들어낸것을 관찰해보니 지혜로운것이 많았다. 시기에 따라 볼때 원시시대 사람들의 초라함을 볼수 있다. 놀거나 일할때 비록 거문고와 비파, 망고, 쟁기, 병과 등 물건들이 있었으나 간단한 생활이 상상된다. 황제때 가옥, 의상, 배와 차, 활과 화살, 책, 도화, 율력, 산수가 생겼다. 홍수전에 황제시기가 전성기였다” 황제와 염제시기에 화하족이 점차적으로 형성되었기에 그들을 모두 화하민족의 공동한 선조로 여기고 중국사람들은 “염황자손”이라 자칭합니다.


三、치우


상고시대 구여족 부락의 추장, 그의 신분에 관하여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 약 4600여년전, 황제가 염제를 싸워 이긴후 오늘의 하북 탁록현 경내에서 치우부락과의 전쟁 – 탁록지전을 벌려 치우가 전사하고 동이, 구여 등 부족들이 염황의 부족에 융입하여 오늘날 중화민족의 최초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하북성 탁록현 경내에는 아직도 헌원언덕, 치우무덤, 황제샘(판샘), 치우삼채, 치우샘, 팔괘촌, 정차대, 치우열염산, 토탑, 상하칠기, 교산 등 유적지들이 남아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탁록현지」, 「사기」, 「수경주」등 문헌 역사자료와 현대건축 “중화삼조당”등을 읽어보면 알수 있습니다.


四、요


성 이기, 이름 방훈, 당후로 있었기에 역사상에서 당요라고도 불렀습니다. 요는 중국 고대 인민들의 이상속의 대동사회의 좋은 국군이였습니다. 요는 인자하고 인민들을 아끼였으며 사람을 잘 관찰하고 나라를 잘 다스르고 성덕이 천하에 유명하였습니다. 때문에 각 부족의 수령들은 너도나도 지임금을 떠나 요에게로 다가왔습니다. 나이가 든후 아들 단주가 불효하여 순에게 선위하였습니다. 그의 “천하사람들에게 해가 되고 한사람에게만 유리하게 할수 없다”라는 말은 공자의 칭찬을 받았고 유가 정신의 시조로 되었습니다. 임분요두구는 진대에 건설된 요묘와 당대에 건설된 요릉이 있고 경내 이촌에 요임금이 출생할때 쓴 “이장유지가”가 있고 촌 서토 언덕에는 명나라때 세운 “제요모차토계”패가 있습니다. 임분분지 양분현도사 용산문화유적지중에서는 최근 몇년래에 5천년전의 타고, 석경, 제사건축 등을 발견하였는데 전문가들은 요임금 – 도당씨와 관련된다고 여기였고 당요시대에 이미 국가 왕권이 형성되고 화하민족이 문명사회에 정식으로 들어섰음이 확인되였습니다.


五、순


순, 전설속의 상고제왕명, 부계씨족사회 후기 부락연맹의 수령. 성 요, 유우씨, 이름 중화, 역사상 우순이라 부릅니다. 황제의 후예로 현명하고 효심이 커 사악에 의해 요의 계승자로 추천받았습니다. 요를 보좌하여 섭정하는 기간에 사흉을 징벌하고 팔개, 팔원 등 재와 덕을 겸비한 사람을 천거하고 사방을 순찰하여 지키고 예제를 정돈하고 형벌을 감하고 도량형을 통일하였습니다. 요가 세상을 뜨자 제위에 등극한후 포판에 수도를 세우고 우, 고도, 기, 계, 후직 등 사람들을 등용하였으며 관리고과제도를 세우고 천하를 잘 다스려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역사에서는 천하의 명덕은 모두 요임금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만년에 우를 후임자로 추천하였다고 했습니다. 운성시구전 10킬로미터의 명조강 순릉은 당나라 개원 26년 (738)에 건설되었고 몇차례의 파손되 재건을 거듭하였습니다. 호남성 구이산의 순임금릉묘도 여러차례 옮겼었습니다. 

六、우
 

우, 사성 하후씨, 이름 문명, 호 우, 후세는 대우라 존칭하였고 황제 헌원씨의 현손입니다. 선양제를 통하여 제위를 얻었고 하위씨부락의 수령으로서 세습제, 중국 노예제의 창시자라고 전해왔습니다.「사기.하본기」에서는 “우는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민첩하고 근면하다. 그는 도덕을 지키고 인자하고 온화하며 말에 믿음성이 있다. 그의 목소리를 음률로, 그의 몸을 척도로 하여 음율과 척도를 가늠한다. 그는 근면하고 장중하고 엄숙하여 백관의 모범이라 할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순의 명을 받들어 홍수를 다스리었는데 몸과 마음을 다해 13년만에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또 구주를 개척하고 구도를 소통시키며 구택을 축조하고 구산에 길을 뚫고 논밭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부세를 제정하고 순을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려 순은 우를 계승자로 선택하였습니다. 순이 세상을 뜬후 제위에 올랐고 동쪽을 순행하던 과정에서 회계(절강 소흥 동남쪽)에서 붕어하였습니다.


七、개자추(? ~ 기원전 636년)
 

개지추 (개추)라고도 하고 개자라고도 부릅니다. 중이(진문공)을 따라 19년간 망명생활을 하였습니다. 할고담군. 문공이 복귀한후 개지추에게 “봉록을 주지 않아” 개지추가 면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진문공이 그를 불렀으나 개자추가 나오지 않자 산에 불을 질렀고 개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죽었습니다. 진문공은 면산을 개지추의 명의상의 봉전으로 하여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고 선한 사람을 높이 칭찬”하였습니다. 때문에 면산을 개산이라고도 합니다. 그의 선행은 세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중국 전통 관념중의 충의지사의 정신적 연원입니다. 한식절에 개지추 제사를 지내는것도 이로부터 온것입니다.


八、정영


춘추시기의 진국경. 경공3년(기원전 597년) 조씨가문이 재난을 당하여 조삭의 처 장희공주가 경공궁에 피해있다가 유복자인 조무를 낳았습니다. 정영은 친구인 공손저구와 함께 원쑤 몰래 조씨 최후의 혈맥을 남겼습니다. 저구는 죽고 정영은 자신의 아들과 조무를 바꿔 그를 키워 조씨의 자리를 광복시키게 하였습니다. 정영과 공손저구의 사적은 후세에 전해 내려오면서 찬양을 받았고 극본으로 짜 해외로 나가기까지 하였습니다.


九、조무영왕(약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


명 옹, 숙후자, 영성 조씨. 전국 조군 (기원전 325년부터 기원전 299년까지 재위, 27년간 집정). “수시로 법을 만들고 사안에 따라 예법을 만드는”정치사상으로 “호복기사”를 제창하고 낡은 풍속습관을 고치고 군제를 개혁하여 국력이 점차 강해지였습니다. 중산을 멸하고 임호를 격파하고 누번을 격퇴시키고 연, 대를 개발하였습니다. 또 장성을 수축하여군사들이 지키도록 하였으며 진보적인 민족화목정책을 실행하여 북방 변강을 공고히 하고 국부적인 통일을 강화하여 이후의 진, 한이 북방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닦아주었습니다. 조무령왕의 묘위는 산서성 대동시 령구현에 위치하여 있어 령구라는 이름이 이로부터 왔습니다.


十、순자 (약 기원전 313 ~ 기원전 238년)


명 황, 자 경, 서한선제 유순위와 구분하기 위하여 “손경”이라고도 부르고 세인들은 그를 “순경”이라 존칭하였습니다. 전국 사상가. 제, 진, 조, 초 등 국에 유학하였고 후에는 직의 학사로 되었으며 제나라 직하 학관의 좨주를 3차례 맡았습니다.  초나라 춘신군의 부름을 받고 초란릉 (오늘의 산동 창산)령을 맡아 여생을 책쓰는것으로 마쳤습니다. 그의 지식은 유가에서 왔고 또 유가사상을 발전시켜 성악론을 제창하여 맹자의 성선론과 반대였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고대 유물주의 사상을 발전시켜 “천명으로부터 받은것을 사용한다”라는 사람의 힘이 운명을 극복할수 있다는 사상을 제출하였습니다. 또 후천적 환경과 교육의 작용을 중시하였고「순자」라는 책을 내놓았으며 유가 전적을 재정리하는데에서도 매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유명한 법학 대표인물 한비, 이사는 모두 그의 학생입니다.


十一、관우(? ~ 219년)


자 장생, 후에 자를 운장이라 고치고 하동 해현 (산서 임기)사람입니다. 유비 수하장군. 동한말년에 유비를 따라 기병하여 유비가 원소에게 투항한후 조조에게 붙잡혔다가 높은 관직을 마다하고 여전히 유비에게 돌아갔습니다. 유비가 강남 저군을 차지한후 그는 샹양태수를 맡아 형주의 군정을 다스렸습니다. 건안 24년 (219년), 부하를 거느리고 번성에서 조인을 포위하였다가 우금의 원군을 크게 패배시켜 중원에 위엄이 진동하였으나 후에 형주가 함락되면서 살해당했습니다. 「삼국지. 관우전」에서는 그를 “당대의 호신”, “국사지풍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관우가 세상을 뜬후 그의 형상은 후인들에 의해 신화되여 민간 제사의 대상이 되였고 그를 “관공”이라 존칭하였으며 청나라때 그를 “관성”이라 받들어 “문성” 공자와 같이 유명했습니다.


十二、


속성 공, 평양무양(산서샹환)사람, 동진 승인. 중국에서 처음으로 해외에 가서 불경을 구해오고 법사를 구한 대사이고 걸출한 여행가와 번역가입니다. 세살때 출가하여 미사가 되었고 “율장이 완비되어 있지 않은것”을 한탄하여 찾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전후로 40여년간 30여개 국을 편력하여 백여만자의 불경을 번역하였고「불국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중아시아, 인도, 남양 등 30국의 지리, 교통, 종교, 문화, 물산, 풍습 심지어 사회, 경제 등 모든 방면을 서술한 중국과 인도간 육상,해상교통의 최초 기술로서 중국과 남아시아 지리학사와 항해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합니다.


十三、왕지환(688-742)


자 계릉, 완지환은 태원 왕가에서 태여낳고 원적은 진양(현재의 산서 태원)이며 고조부가 현재의 산서 장현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성당의 유명한 시인이였습니다.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어릴적부터 경전의 심오함을 깨닫고 고적, 왕창령과 자주 서로 화답하였고 그의 시는 자주 악공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 한때 이름을 날렸습니다. 변새 풍광 묘사에 유명하고 현재는「등관작루」,「양주사」등 여섯 편의 시만 남아있습니다. 그의 시작인 "천리밖을 보고자하면, 한층더 올라가야한다" 이상을 추구하는 좌우명으로 오랜시간 동안 남아있습니다.


十四、무측천(624년2월17일-705년12월16일)


원적은 병주문수(현재의 산서성 문수현).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이고 걸출한 여 정치자 입니다. 당고종 시기때부터 수렴청정하여 705년에 퇴위하였고 무측천은 이당왕조를 반세기동안 지배하였습니다. 서기 690년 국호를 주로 고쳤고 성선황제라 자칭하였으며 동도의 낙양을 신도로 하였고 무주라고 하였습니다. 무측천이 재위시 정치가 잘 이루어져 국민들이 단결하였고 국가가 강성하였습니다. 정치상 가혹한 관리를 임용하였으나 양신으로 하여금 권리를 장악하여 가혹한 관리를 억제하게 하여 정치가 청명하였습니다. 705년 11월 낙양 상양궁에서 흥사된후 고종과 건릉에 합장되였고 무자비를 세워 일생의 공로와 과실을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평가하게 하였습니다.


十五、부산 (1607년 ~ 1684년)


초명 정신, 자 청죽, 후에 자를 청주라 고쳤고 호는 공타, 장로, 탁옹 등이 있습니다. 산서 양곡사람. 명나라말 스승 원계함의 억울함을 풀어줘 천하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은거생활을 하면서 간고하게 살고 절개를 굽히지 않고 관직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주의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많은 책들을 보았는데 경, 자, 사, 집외에도 불경, 도경도 열독하여 고대사상 문화사에서의 기봉이 되어 “청초6대사”, 학해라고 불리웠습니다. 서법, 회화, 예술 심지어 의학면에서도 비범한 조예가 있었고 서법은 세인들로부터 “청초제일서예가”라고 불리웠으며 그의 “사녕사무” 이론은 영향이 오래 갔습니다. 또「상홍감집」, 「부청주녀과」, 「부청주남과」등이 있었는데 비록 정사에는 많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명성과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十六、고군우 (1896~1925)


고군우는 중국공산당 초기의 유명한 정치 활동가였고 산서 당원 조직의 청설자 중의 한사람입니다. 고군우 본명은 고상덕이였고 자 석삼, 산서 정악 사람입니다. 오사운동때 북경대학 학생회 책임자였습니다. 1915년 고군우는 북격대학에 입학하였고 학습시절에 혁명 선구자인 이대교를 만나 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북경재학교 학생회가 성립되었고 고군우는 학생화 책입자로 당선되었습니다. 1920년 3월 이대교의 지도하에 등중하 등 사람들과 같이 비밀적으로 마르크스주의학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북경지역 공산주의 소조에서 최초의 성원중 한명이였습니다. 192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그후 이대교로부터 산서 태원에 파견되었으며 산서지역 당원 조직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1922년에 중국사회주의 청년단 1기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十七、팽진(1902 ~ 1997)


곡옥현 사람입니다. 본명은 푸마오공이고 부무공이라는 이름도 사용한적 있습니다. 1923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고 1923년 겨울에 중국공산당원으로 전변하였습니다. 팽진 동지는 위대한 무산계급의 혁명가, 정치가, 걸출한 국무 활동가,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 우리나라 사회주의 법제의 주요 창시자이고 당과 국가의 탁월한 영도인입니다. 팽진 동지는 견고한 공산주의 신념과 백절불구, 강한 의지로 당과 인민에 대해 무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카르크스주의의 입장, 관점과 방법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였고 창도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열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담략과 재능을 구비하였습니다. 당과 국가의 장래 운명에 연관되는 관건적 시간과 중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그는 원칙을 견지하고 정치적 태도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는 시종으로 정성껏 국민을 위해 복무하는 종지를 명심하였고 국민 공복의 본색을 유지하였으며 겸손하고 신중하며 간고하고 소박하며 자신을 엄격히 단속하였습니다. 그는 모법적으로 민주 집중제 원칙과 당의 집체 영도 제도를 집행하였고 당의 민중 노선, 대중속에 들어가고 실제를 깊이 파고 들며 일하는 방법 민주를 견지하였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진리를 추구하였고 어떠한 곤난과 좌절 앞에서도 낙관주의 정신을 유지하고 당의 사업에 대한 필승의 신심이 가득하였습니다.


十八、류후란(류호란)(1932년~1947년)


산서성 원수이현 운주서촌 사람입니다. (현재 류후란(류호란)촌으로 변명하였습니다.)1945년 중국공산당 여간부 훈련반에 가입하였고 1946년 운주서촌에 파견되여 부녀 업무를 보면서 후보 당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1947년 1월12일 류후란(류호란)이 체포되여 항복을 거절하여 작두아래 착살당하였으며 당시 15살이였습니다. 그후 류후란(류호란)은 진수 지국에 의해 중국공산당 정식 당원으로 추인하였습니다. 모택동은 그해 "위대하게 살고 영광스럽게 죽었다"라고 그를 위하여 제사를 달았습니다. 15상의 시골 소녀, 15살의 꽃다운 나이에 그는 보귀한 생명으로 적들의 죄악의 음모를 꺾었으며 청춘의 열혈로 공산당원의 지고한 절개를 적어 놓았습니다.


十九、염석산 (1883~1960)


자백천, 조촨. 산서 도대현 사람이고 조기에 일본에가서 군사를 학습하였습니다. 1905년 동경에서 중국 혁명 동맹회에 가입하였습니다. 1909년 일본의 육군 사관학교에서 졸업하였고 귀국후 산서 육군 감독, 신군표통을 역임하여 반청활동에 참가하였습니다. 1911년 무창기의에 참가한후 산서의 도독으로 선거되였고 북양정부 기간에 원세개를 지지하여 산서성 성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1927년 국민군 북방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산서 숙당하고 반공하였으며 다음해에 제3집단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1929년 당생지의 토발에 참가하였고 장개석에 유해공군의 부총사령관으로 위임하였습니다. 1930년 풍옥상과 이종인과 함께 반장 활동을 하였으나 실패후 대련으로 도망하였습니다. 1932년에 태원 수경관공서의 주임으로 임명하였고 다시 한번 산서 군정대권을 장악하였습니다. 918사변후 장개석의 무저항 정책을 지지하였습니다. 항일 전쟁 시기에 "항일화일, 연공반공, 옹장거장"의 양면 정책을 채택하였습니다. 항일 전쟁후 장개석과 중국공산다의 작전을 지지하였습니다. 1949년 4월 인민해방군는 태원을 점령후 산서에서 도망쳤고 6월 광주에서 국민정부가 대륙에서의 마지막 행정원장 겸 국방부장을 담당하였습니다. 그 뒤 대만으로 가서 "행정원장"과 국민당 평의위원으로 임명되였고 1960년에 타이베이에서 병사하였습니다.


二十、공상희(1880~1967)

 
자용지, 호자원,산서성 태곡현의 상인이자 유가의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그의 조부는 공세17패 제47호-지방호입니다. 62대조 공상이는 태고로 이사하였습니다. 공상희는 공자의 제75대 후손입니다. 중화민국남경국민정부 행정원장 겸 재무부장으로 은행가 및 부유한 상인이였습니다. 공상희의 부인은 송애령이고 공과 송자문, 장개석은 인척 관계입니다. 공상희는 장기적으로 국민정부 재정을 주관하였고 주요 정치 업적은 중국 화폐 제도의 개혁과 중국 은행 체계를 건설하고 국가에서 자본 시장에 대한 공제를 확대한것입니다.


명인명가

 

一、염제


화하족의 선조, 호는 열산씨이고 력산씨라고도 부릅니다. 상고시대 강씨부족의 수령. 염제는 오곡을 심어 인민들의 식물로 하고, 쟁기를 만들어 밭을 갈고 김을 맸으며, 백초를 맛보아 인민들의 병을 치료하였고, 마를 천으로 하여 인민들의 추위를 덜어주었고, 기물을 만들어 인민들이 사용할수 있게 하였고, 오동나무를 깍아 거문고를 만들어 인민들이 즐거움을 누릴수 있게 하였으며, 낮에는 장사를 하여 인민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고, 나무가지를 깍아 화살을 만들어 인민들이 안거할수 있게 하고, 팔괘를 보아 천상을 연구하였으며, 남방을 순행하는 과정중에 인민들을 위하여 병을 치료하고 약을 캤고, 하루에 70여가지의 독을 접하였어도 포기하지 않았다가 겔세민을 잘못 맛보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인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첫부의 의학저작을「신농본초경」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산서성 고평시 신농진 장리촌에 위치한 염제릉은 바로 염제를 제사하기 위한 전문 장소입니다. 


二、황제(기원전 2717년 – 기원전 2599년)


헌원황제는 중화민족의 시조로서 “화하시조”로 높이 받들리고 있습니다. 중국 원고시대 부락 연맹의 수령. 소전의 아들, 본 성은 공손, 희수에 오래 거주하여 성을 희라고 고치고 헌원의 언덕에 살았기에 (오늘의 하남성 신정 서북쪽)호를 헌원씨라고 하였습니다. 출생, 창업과 건도를 모두 우유웅 (오늘의 하남성 신정)에서 했기에 또 우웅씨라고도 불리우고 토덕지단이 있기에 황제라 불리웠습니다. 그는 중화민족 통일이라는 위대한 업적으로 사서에 기재되였습니다. “수인에서 당, 여 홍수때까지 년도수는 명확치 않으나 적어도 수천년은 넘었을것이다. 그가 만들어낸것을 관찰해보니 지혜로운것이 많았다. 시기에 따라 볼때 원시시대 사람들의 초라함을 볼수 있다. 놀거나 일할때 비록 거문고와 비파, 망고, 쟁기, 병과 등 물건들이 있었으나 간단한 생활이 상상된다. 황제때 가옥, 의상, 배와 차, 활과 화살, 책, 도화, 율력, 산수가 생겼다. 홍수전에 황제시기가 전성기였다” 황제와 염제시기에 화하족이 점차적으로 형성되었기에 그들을 모두 화하민족의 공동한 선조로 여기고 중국사람들은 “염황자손”이라 자칭합니다.


三、치우


상고시대 구여족 부락의 추장, 그의 신분에 관하여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 약 4600여년전, 황제가 염제를 싸워 이긴후 오늘의 하북 탁록현 경내에서 치우부락과의 전쟁 – 탁록지전을 벌려 치우가 전사하고 동이, 구여 등 부족들이 염황의 부족에 융입하여 오늘날 중화민족의 최초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하북성 탁록현 경내에는 아직도 헌원언덕, 치우무덤, 황제샘(판샘), 치우삼채, 치우샘, 팔괘촌, 정차대, 치우열염산, 토탑, 상하칠기, 교산 등 유적지들이 남아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탁록현지」, 「사기」, 「수경주」등 문헌 역사자료와 현대건축 “중화삼조당”등을 읽어보면 알수 있습니다.


四、요


성 이기, 이름 방훈, 당후로 있었기에 역사상에서 당요라고도 불렀습니다. 요는 중국 고대 인민들의 이상속의 대동사회의 좋은 국군이였습니다. 요는 인자하고 인민들을 아끼였으며 사람을 잘 관찰하고 나라를 잘 다스르고 성덕이 천하에 유명하였습니다. 때문에 각 부족의 수령들은 너도나도 지임금을 떠나 요에게로 다가왔습니다. 나이가 든후 아들 단주가 불효하여 순에게 선위하였습니다. 그의 “천하사람들에게 해가 되고 한사람에게만 유리하게 할수 없다”라는 말은 공자의 칭찬을 받았고 유가 정신의 시조로 되었습니다. 임분요두구는 진대에 건설된 요묘와 당대에 건설된 요릉이 있고 경내 이촌에 요임금이 출생할때 쓴 “이장유지가”가 있고 촌 서토 언덕에는 명나라때 세운 “제요모차토계”패가 있습니다. 임분분지 양분현도사 용산문화유적지중에서는 최근 몇년래에 5천년전의 타고, 석경, 제사건축 등을 발견하였는데 전문가들은 요임금 – 도당씨와 관련된다고 여기였고 당요시대에 이미 국가 왕권이 형성되고 화하민족이 문명사회에 정식으로 들어섰음이 확인되였습니다.


五、순


순, 전설속의 상고제왕명, 부계씨족사회 후기 부락연맹의 수령. 성 요, 유우씨, 이름 중화, 역사상 우순이라 부릅니다. 황제의 후예로 현명하고 효심이 커 사악에 의해 요의 계승자로 추천받았습니다. 요를 보좌하여 섭정하는 기간에 사흉을 징벌하고 팔개, 팔원 등 재와 덕을 겸비한 사람을 천거하고 사방을 순찰하여 지키고 예제를 정돈하고 형벌을 감하고 도량형을 통일하였습니다. 요가 세상을 뜨자 제위에 등극한후 포판에 수도를 세우고 우, 고도, 기, 계, 후직 등 사람들을 등용하였으며 관리고과제도를 세우고 천하를 잘 다스려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역사에서는 천하의 명덕은 모두 요임금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만년에 우를 후임자로 추천하였다고 했습니다. 운성시구전 10킬로미터의 명조강 순릉은 당나라 개원 26년 (738)에 건설되었고 몇차례의 파손되 재건을 거듭하였습니다. 호남성 구이산의 순임금릉묘도 여러차례 옮겼었습니다. 

六、우
 

우, 사성 하후씨, 이름 문명, 호 우, 후세는 대우라 존칭하였고 황제 헌원씨의 현손입니다. 선양제를 통하여 제위를 얻었고 하위씨부락의 수령으로서 세습제, 중국 노예제의 창시자라고 전해왔습니다.「사기.하본기」에서는 “우는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민첩하고 근면하다. 그는 도덕을 지키고 인자하고 온화하며 말에 믿음성이 있다. 그의 목소리를 음률로, 그의 몸을 척도로 하여 음율과 척도를 가늠한다. 그는 근면하고 장중하고 엄숙하여 백관의 모범이라 할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순의 명을 받들어 홍수를 다스리었는데 몸과 마음을 다해 13년만에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또 구주를 개척하고 구도를 소통시키며 구택을 축조하고 구산에 길을 뚫고 논밭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부세를 제정하고 순을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려 순은 우를 계승자로 선택하였습니다. 순이 세상을 뜬후 제위에 올랐고 동쪽을 순행하던 과정에서 회계(절강 소흥 동남쪽)에서 붕어하였습니다.


七、개자추(? ~ 기원전 636년)
 

개지추 (개추)라고도 하고 개자라고도 부릅니다. 중이(진문공)을 따라 19년간 망명생활을 하였습니다. 할고담군. 문공이 복귀한후 개지추에게 “봉록을 주지 않아” 개지추가 면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진문공이 그를 불렀으나 개자추가 나오지 않자 산에 불을 질렀고 개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죽었습니다. 진문공은 면산을 개지추의 명의상의 봉전으로 하여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고 선한 사람을 높이 칭찬”하였습니다. 때문에 면산을 개산이라고도 합니다. 그의 선행은 세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중국 전통 관념중의 충의지사의 정신적 연원입니다. 한식절에 개지추 제사를 지내는것도 이로부터 온것입니다.


八、정영


춘추시기의 진국경. 경공3년(기원전 597년) 조씨가문이 재난을 당하여 조삭의 처 장희공주가 경공궁에 피해있다가 유복자인 조무를 낳았습니다. 정영은 친구인 공손저구와 함께 원쑤 몰래 조씨 최후의 혈맥을 남겼습니다. 저구는 죽고 정영은 자신의 아들과 조무를 바꿔 그를 키워 조씨의 자리를 광복시키게 하였습니다. 정영과 공손저구의 사적은 후세에 전해 내려오면서 찬양을 받았고 극본으로 짜 해외로 나가기까지 하였습니다.


九、조무영왕(약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


명 옹, 숙후자, 영성 조씨. 전국 조군 (기원전 325년부터 기원전 299년까지 재위, 27년간 집정). “수시로 법을 만들고 사안에 따라 예법을 만드는”정치사상으로 “호복기사”를 제창하고 낡은 풍속습관을 고치고 군제를 개혁하여 국력이 점차 강해지였습니다. 중산을 멸하고 임호를 격파하고 누번을 격퇴시키고 연, 대를 개발하였습니다. 또 장성을 수축하여군사들이 지키도록 하였으며 진보적인 민족화목정책을 실행하여 북방 변강을 공고히 하고 국부적인 통일을 강화하여 이후의 진, 한이 북방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닦아주었습니다. 조무령왕의 묘위는 산서성 대동시 령구현에 위치하여 있어 령구라는 이름이 이로부터 왔습니다.


十、순자 (약 기원전 313 ~ 기원전 238년)


명 황, 자 경, 서한선제 유순위와 구분하기 위하여 “손경”이라고도 부르고 세인들은 그를 “순경”이라 존칭하였습니다. 전국 사상가. 제, 진, 조, 초 등 국에 유학하였고 후에는 직의 학사로 되었으며 제나라 직하 학관의 좨주를 3차례 맡았습니다.  초나라 춘신군의 부름을 받고 초란릉 (오늘의 산동 창산)령을 맡아 여생을 책쓰는것으로 마쳤습니다. 그의 지식은 유가에서 왔고 또 유가사상을 발전시켜 성악론을 제창하여 맹자의 성선론과 반대였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고대 유물주의 사상을 발전시켜 “천명으로부터 받은것을 사용한다”라는 사람의 힘이 운명을 극복할수 있다는 사상을 제출하였습니다. 또 후천적 환경과 교육의 작용을 중시하였고「순자」라는 책을 내놓았으며 유가 전적을 재정리하는데에서도 매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유명한 법학 대표인물 한비, 이사는 모두 그의 학생입니다.


十一、관우(? ~ 219년)


자 장생, 후에 자를 운장이라 고치고 하동 해현 (산서 임기)사람입니다. 유비 수하장군. 동한말년에 유비를 따라 기병하여 유비가 원소에게 투항한후 조조에게 붙잡혔다가 높은 관직을 마다하고 여전히 유비에게 돌아갔습니다. 유비가 강남 저군을 차지한후 그는 샹양태수를 맡아 형주의 군정을 다스렸습니다. 건안 24년 (219년), 부하를 거느리고 번성에서 조인을 포위하였다가 우금의 원군을 크게 패배시켜 중원에 위엄이 진동하였으나 후에 형주가 함락되면서 살해당했습니다. 「삼국지. 관우전」에서는 그를 “당대의 호신”, “국사지풍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관우가 세상을 뜬후 그의 형상은 후인들에 의해 신화되여 민간 제사의 대상이 되였고 그를 “관공”이라 존칭하였으며 청나라때 그를 “관성”이라 받들어 “문성” 공자와 같이 유명했습니다.


十二、


속성 공, 평양무양(산서샹환)사람, 동진 승인. 중국에서 처음으로 해외에 가서 불경을 구해오고 법사를 구한 대사이고 걸출한 여행가와 번역가입니다. 세살때 출가하여 미사가 되었고 “율장이 완비되어 있지 않은것”을 한탄하여 찾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전후로 40여년간 30여개 국을 편력하여 백여만자의 불경을 번역하였고「불국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중아시아, 인도, 남양 등 30국의 지리, 교통, 종교, 문화, 물산, 풍습 심지어 사회, 경제 등 모든 방면을 서술한 중국과 인도간 육상,해상교통의 최초 기술로서 중국과 남아시아 지리학사와 항해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합니다.


十三、왕지환(688-742)


자 계릉, 완지환은 태원 왕가에서 태여낳고 원적은 진양(현재의 산서 태원)이며 고조부가 현재의 산서 장현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성당의 유명한 시인이였습니다.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어릴적부터 경전의 심오함을 깨닫고 고적, 왕창령과 자주 서로 화답하였고 그의 시는 자주 악공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 한때 이름을 날렸습니다. 변새 풍광 묘사에 유명하고 현재는「등관작루」,「양주사」등 여섯 편의 시만 남아있습니다. 그의 시작인 "천리밖을 보고자하면, 한층더 올라가야한다" 이상을 추구하는 좌우명으로 오랜시간 동안 남아있습니다.


十四、무측천(624년2월17일-705년12월16일)


원적은 병주문수(현재의 산서성 문수현).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이고 걸출한 여 정치자 입니다. 당고종 시기때부터 수렴청정하여 705년에 퇴위하였고 무측천은 이당왕조를 반세기동안 지배하였습니다. 서기 690년 국호를 주로 고쳤고 성선황제라 자칭하였으며 동도의 낙양을 신도로 하였고 무주라고 하였습니다. 무측천이 재위시 정치가 잘 이루어져 국민들이 단결하였고 국가가 강성하였습니다. 정치상 가혹한 관리를 임용하였으나 양신으로 하여금 권리를 장악하여 가혹한 관리를 억제하게 하여 정치가 청명하였습니다. 705년 11월 낙양 상양궁에서 흥사된후 고종과 건릉에 합장되였고 무자비를 세워 일생의 공로와 과실을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평가하게 하였습니다.


十五、부산 (1607년 ~ 1684년)


초명 정신, 자 청죽, 후에 자를 청주라 고쳤고 호는 공타, 장로, 탁옹 등이 있습니다. 산서 양곡사람. 명나라말 스승 원계함의 억울함을 풀어줘 천하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은거생활을 하면서 간고하게 살고 절개를 굽히지 않고 관직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주의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많은 책들을 보았는데 경, 자, 사, 집외에도 불경, 도경도 열독하여 고대사상 문화사에서의 기봉이 되어 “청초6대사”, 학해라고 불리웠습니다. 서법, 회화, 예술 심지어 의학면에서도 비범한 조예가 있었고 서법은 세인들로부터 “청초제일서예가”라고 불리웠으며 그의 “사녕사무” 이론은 영향이 오래 갔습니다. 또「상홍감집」, 「부청주녀과」, 「부청주남과」등이 있었는데 비록 정사에는 많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명성과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十六、고군우 (1896~1925)


고군우는 중국공산당 초기의 유명한 정치 활동가였고 산서 당원 조직의 청설자 중의 한사람입니다. 고군우 본명은 고상덕이였고 자 석삼, 산서 정악 사람입니다. 오사운동때 북경대학 학생회 책임자였습니다. 1915년 고군우는 북격대학에 입학하였고 학습시절에 혁명 선구자인 이대교를 만나 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 북경재학교 학생회가 성립되었고 고군우는 학생화 책입자로 당선되었습니다. 1920년 3월 이대교의 지도하에 등중하 등 사람들과 같이 비밀적으로 마르크스주의학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북경지역 공산주의 소조에서 최초의 성원중 한명이였습니다. 192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그후 이대교로부터 산서 태원에 파견되었으며 산서지역 당원 조직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1922년에 중국사회주의 청년단 1기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十七、팽진(1902 ~ 1997)


곡옥현 사람입니다. 본명은 푸마오공이고 부무공이라는 이름도 사용한적 있습니다. 1923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고 1923년 겨울에 중국공산당원으로 전변하였습니다. 팽진 동지는 위대한 무산계급의 혁명가, 정치가, 걸출한 국무 활동가,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 우리나라 사회주의 법제의 주요 창시자이고 당과 국가의 탁월한 영도인입니다. 팽진 동지는 견고한 공산주의 신념과 백절불구, 강한 의지로 당과 인민에 대해 무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카르크스주의의 입장, 관점과 방법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였고 창도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열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담략과 재능을 구비하였습니다. 당과 국가의 장래 운명에 연관되는 관건적 시간과 중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그는 원칙을 견지하고 정치적 태도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는 시종으로 정성껏 국민을 위해 복무하는 종지를 명심하였고 국민 공복의 본색을 유지하였으며 겸손하고 신중하며 간고하고 소박하며 자신을 엄격히 단속하였습니다. 그는 모법적으로 민주 집중제 원칙과 당의 집체 영도 제도를 집행하였고 당의 민중 노선, 대중속에 들어가고 실제를 깊이 파고 들며 일하는 방법 민주를 견지하였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진리를 추구하였고 어떠한 곤난과 좌절 앞에서도 낙관주의 정신을 유지하고 당의 사업에 대한 필승의 신심이 가득하였습니다.


十八、류후란(류호란)(1932년~1947년)


산서성 원수이현 운주서촌 사람입니다. (현재 류후란(류호란)촌으로 변명하였습니다.)1945년 중국공산당 여간부 훈련반에 가입하였고 1946년 운주서촌에 파견되여 부녀 업무를 보면서 후보 당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1947년 1월12일 류후란(류호란)이 체포되여 항복을 거절하여 작두아래 착살당하였으며 당시 15살이였습니다. 그후 류후란(류호란)은 진수 지국에 의해 중국공산당 정식 당원으로 추인하였습니다. 모택동은 그해 "위대하게 살고 영광스럽게 죽었다"라고 그를 위하여 제사를 달았습니다. 15상의 시골 소녀, 15살의 꽃다운 나이에 그는 보귀한 생명으로 적들의 죄악의 음모를 꺾었으며 청춘의 열혈로 공산당원의 지고한 절개를 적어 놓았습니다.


十九、염석산 (1883~1960)


자백천, 조촨. 산서 도대현 사람이고 조기에 일본에가서 군사를 학습하였습니다. 1905년 동경에서 중국 혁명 동맹회에 가입하였습니다. 1909년 일본의 육군 사관학교에서 졸업하였고 귀국후 산서 육군 감독, 신군표통을 역임하여 반청활동에 참가하였습니다. 1911년 무창기의에 참가한후 산서의 도독으로 선거되였고 북양정부 기간에 원세개를 지지하여 산서성 성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1927년 국민군 북방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산서 숙당하고 반공하였으며 다음해에 제3집단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1929년 당생지의 토발에 참가하였고 장개석에 유해공군의 부총사령관으로 위임하였습니다. 1930년 풍옥상과 이종인과 함께 반장 활동을 하였으나 실패후 대련으로 도망하였습니다. 1932년에 태원 수경관공서의 주임으로 임명하였고 다시 한번 산서 군정대권을 장악하였습니다. 918사변후 장개석의 무저항 정책을 지지하였습니다. 항일 전쟁 시기에 "항일화일, 연공반공, 옹장거장"의 양면 정책을 채택하였습니다. 항일 전쟁후 장개석과 중국공산다의 작전을 지지하였습니다. 1949년 4월 인민해방군는 태원을 점령후 산서에서 도망쳤고 6월 광주에서 국민정부가 대륙에서의 마지막 행정원장 겸 국방부장을 담당하였습니다. 그 뒤 대만으로 가서 "행정원장"과 국민당 평의위원으로 임명되였고 1960년에 타이베이에서 병사하였습니다.


二十、공상희(1880~1967)

 
자용지, 호자원,산서성 태곡현의 상인이자 유가의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그의 조부는 공세17패 제47호-지방호입니다. 62대조 공상이는 태고로 이사하였습니다. 공상희는 공자의 제75대 후손입니다. 중화민국남경국민정부 행정원장 겸 재무부장으로 은행가 및 부유한 상인이였습니다. 공상희의 부인은 송애령이고 공과 송자문, 장개석은 인척 관계입니다. 공상희는 장기적으로 국민정부 재정을 주관하였고 주요 정치 업적은 중국 화폐 제도의 개혁과 중국 은행 체계를 건설하고 국가에서 자본 시장에 대한 공제를 확대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