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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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예사일


전설에 의하면 먼 옛날에 하늘에는 태양이 10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동방상제의 아들이 였는데 이 10개의 태양은 그들의 어머님, 상제의 아내와 함께 동해변가에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주 10명의 아이를 세계 제일 동쪽에 있는 동해에서 목욕을 씻겼고 목욕후 아이들을 새마냥 한그루의 큰나무에서 서식하게 하였습니다. 태양마다 형사상의 중심이 모두 새였기에 이 큰나무는 그들의 집이 되였고 9개의 태양은 비교적 작은 나무에서 서식하였고 나머지 하나의 태양은 나무 꼭대기에서 서식하였습니다.


여명이 아침 햇살이 필요할때에는 나무 꼭대기에서 서식하던 태양이 수레차를 타고 하늘을 통과하여 세상을 비추었고 빛과 열을 세계 곳곳에 뿌렷습니다. 10개의 태양이 매일마다 번갈아 가면서 차례로 당직하였으며 질서가 정연하고 천지만물이 멋지게 조화되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지에서 행복하고 화목하며 이웃처럼 친구처럼 함께 생활하였고 해가 뜨면 생계를 도모하였고 해가 지면 휴식을 취하였으며 생활은 아주 아름답고 원만하였고 인간과 동물도 서로 화목하게 지내왔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은 태양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시진, 광명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은혜에 감동하여 자주 하늘을 향해 고두하여 읍하며 최상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 10개의 태양은 지루함을 느껴 다 같이 하늘을 주유하고 싶었고 이는 틀림없이 재미있을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명이 찾아올때 10개의 태양은 함께 수레차에 올라 하늘을 통과할 귀로에 올랐습니다. 이로 인해 대지의 사람과 만물은 모두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10개의 태양은 10개의 불덩어리와 같이 방출하는 열량이 대지를 태웠고 아주 많은 사람과 동물들을 태워 죽였습니다. 삼림이 불이 나자 모든 수목과 작물,그리고 집들은 잿더미로 태워졌습니다. 큰불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과 동물들은 사적으로 달아났고 미친듯이 재난을 피할수 있는 곳과 생명을 구할수 있는 물과 음식을 찾아 다녔습니다.


강이 마르고 바다도 마르기에 직면하고 있으며 모든 어종들이 죽었고 물속의 괴물들은 해안으로 올라와 음식을 도둑질하였습니다. 농작물과 과수원이 불에 타서 말랐고 사람과 동물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는 공급원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태양의 고온에 타죽지 않으면 야수들의 먹이가 되였으며 불바다의 재난속에서 힘겹게 몸부림을 쳤고 하느님의 은사를 간구하였습니다. 이때 젊고 출중한 대신 후예가 나타났고 그는 신전수였으며 사예가 출중하고 백발백중이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에 의해 불러갔고 태양을 몰아내는 사명을 수령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고난속에서 생활하는것을 보고 내심 참을수가 없었고 여분의 9개 태양을 쏘아 떨어뜨려 사람들을 도와 고난속에서 빠져 나갈수 있게 하도록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후예는 99개의 산을 넘고 99의 강을 건너고 99개의 협곡을 지나 동해변가에 도착하였고 큰 산을 타고 올랐으며 산밑에는 바로 망망대해였습니다. 후예는 만근 궁노를 힘껏 당겼고 천근의 화살을 올려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을 조준하여 날렸습니다. 첫번째 태양이 떨어졌습니다. 후예는 또 궁노를 당겨 화살을 올려 쏜 결과 동시에 두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 뜨렸습니다. 그러자 나머지7개의 태양은 눈을 시뻘겋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후예는 나머지 태양도 여전히 타는듯이 뜨거워 세번째 활을 쏘았습니다. 세번째 활은 힘이 아주 쎘습니다.(강했습니다) 동시에 4개의 태양을 떨어뜨리자 나머지 태양은 떨면서 허둥지둥하였습니다. 이렇게 후예는 하나하나씩 활을 쏘아 빗나감 없이 9개의 태양을 모두 떨어 뜨렸습니다. 화살에 맞은 태양들은 하나 하나씩 죽어나갔습니다. 그들의 깃털은 모두 땅에 떨어졌고 빛과 열은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나머지 하나의 태양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후예의 분부대로 착실하게 대지와 만물에게 계속하여 빛과 열을 공헌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 태양은 매일 동쪽 해변에서 솟아 저녁에는 서쪽에서 해가 졌고 세상을 따듯하게 하였으며 만물의 생존과 인간들의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일할수 있게 유지하였습니다.


개자추의 이야기


기원전 655년, 진나라의 공자 중인은 부친의 총비인 여비의 모함으로 강제적으로 한 무리의 가신들과 창황탈출하여 그로부터 망명 길에 올랐는데 그중에는 개자추도 있었습니다. 초기 중인은 도주시 자주 배불리 먹지 못하고 실오리 하나 걸치지 못하였습니다. <한시외전>에 의하면 한해는 위국으로 도망갔는데 두수라는 수종이 중인의 돈과 식량을 모두 훔쳐 깊은 산속으로 도망갔다고 하였습니다. 중인은 식량이 없고 굶주림을 참지 못해 농부들에게 구걸하였으나 음식을 구걸하지 못하였을 뿐만아니라 반대로 농부들이 흙덩이로 밥을 삼아 잔인하게 조로당하였습니다. 그후 종인은 배고품으로 쓰러질려 하자 중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개자추는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자신의 다리에서 살을 베어내 따다 놓은 야채와 함께 끓여서 중인에게 먹임으로 중인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중인은 자신이 개자추의 다리살을 먹은 사실을 안후 감동 받아 언젠가 군왕이 된다면 반드시 개자추에게 보답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인이 공경에 빠졌을때 가자추가 간뇌도지하고 지극히 충성할수 있는것은 확실히 대견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할고봉군"의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636년, 중인은 진나라 왕위에 올랐고 역사에서 진문공이라 불리웠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면서 아첨하는 한 무리의 대신들로부터 뜻을 이루어 득의양양하며 마음대로 분봉하였습니다. 개자추는 고심하여 충고하였으나 아무 쓸모 없음으로 면산에 은거하여 독선을 선택하였습니다. 진문공이 이를 알고 나서 황급히 대신들을 데리고 면산에 가서 찾아 다녔으나 개자추의 자취를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진문공은 산에 한갈래 길만 남기고 불을 지를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으로 바람이 거세지고 불살이 커지면서 수백리까지 이어졌고 그로부터 3일후 진문공은 산에 올라 찾은 결과 개자추와 어머님이 이미 불바다에 매장된것을 발견하게 되였습니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개자추가 재화를 당한 그달에 전국 집집의 화기를 엄금하고 찬음식을 먹을것을 명령하였고 오랜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이날이 한식날로 형성되였습니다.


옥산토월


소문에 의하면 고대 매년 8월 추석의 밤에 산기슭의 청련사에 콴웨팅에서 바라보면 커다란 보름달이 옥산 쌍봉사이로 나온다고 합니다. 은같은 달빛은 옥산 주변의 산, 림, 물, 돌에 반짝반짝하게 쏟아 부은다고 합니다. 옥산 쌍봉은 얇은 사와 같은 달빛에 감겨 절묘하게 지세를 부각시켜 몽롱하고 희미하여 천궁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대 영탄하는 진성의 명승지인 "옥산토월", 또 "쌍봉봉월"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차를 돌린 이야기


전설:


상전에 의하면 공자가 열국들을 두루 돌아다닐때 학술경연을 하고 정국에서의 유세가 끝난후 차를 타고 곧장 진나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가 수행 제자와 함께 진나라 변경 톈징관 아래의 작은 산골마을(현재의 산서성 택주현 진묘포진의 경내)에 도착하였을때 아이들이 석주성에서 놀면서 길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중 이름이 항탁인 개구쟁이 아이가 "차가 도시를 우회하지 도시가 차를 우회할수 없다"라며 공자에게 말했다. 공자는 항탁이 어리지만 남을 능가하는 점이 있어 그를 선생으로 모셧고 제자에게 성을 돌아 갈것을 명령하였습니다. 톈징관까지 도착하였을때 그는 입에 호두를 물고있는 다람쥐 앞에 뛰여가 인사하고 지저귀였습니다. 공자는 진나라의 개구쟁니 아이가 이와 같이 총명한 것을 보고 동물들한테도 예의를 지키는 점에 감격하여 차를 돌려 남쪽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재 톈징관촌에는 여전히 차를 돌린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후손들은 공자를 봉사하기 위하여 촌의 동만쪽에 문묘(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이 묘는 동한시기 공자의 19대 후손인 공욱이 낙양에서 관직을 맡았을때 건설한것이라고 합니다)를 지었고 "공자가 차를 돌린 자국"이라는 석비와 비각을 세웠고 행소역을 란처춘으로 이름을 고쳤고 그로부터 공자가 차를 돌린 곳이 진성의 유명한 4대 경관중의 하나가 되였습니다.


여와가 하늘을 메우다


전설:


여와는 중국 역사 신화 전설중 여신중의 한명이고 복희와 남매입니다. 인간의 머리이고 뱀의 몸뚱이이고 예전에 오색석을 녹여 하늘을 메웠다고 흙으로 사람을 빚어 냈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예절을 만들어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고 세상 만물을 조화하였습니다. 여와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그는 자상하게 우리를 만들었고 용감하게 우리가 천재를 당하지 않게 보살폈습니다. 민간에서 광범하고 오랫동안 숭배할수 있는 창세신이고 시조신입니다. 그는 신통력이 무궁무진하여 만물을 화생하였고 매일 적어서 70가지 물건을 만들어낼수 있습니다.


태고시대에 수신공공과 화신축융은 사정으로 인해 다투다가 크게 싸웠습니다. 마지막 축융은 싸움에서 이겼고 수신공공은 부끄럽고 분하여 서쪽의 부주산을 들이 받았으나 부주산은 하늘을 지탱하는 기둥이였습니다. 부주산이 파열되면서 하늘과 땅사이를 지탱하던 기둥이 무너졌고 하늘의 반쪽이 붕괴되였고 큰 구멍이 생겼고 땅에고 갈래갈래의 금이 생기면서 삼림은 큰불이 일어나고 홍수가 땅속에서부터 마구 솟아 올라왔으며 용뱀맹수도 나와 인간을 삼켰습니다. 인류는 공전의 대 재난에 직면하게 되였습니다.


여와는 인류가 이와 같은 뜻밖의 재난을 겪고 있는것을 보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하늘을 메워 재난을 끝낼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여러가지의 오색 돌맹이를 모아 불로 녹여 이것으로 하늘의 구멍을 메울것으로 결정하였고 큰 거부기의 네 다리를 세워 무너진 하늘을 지탱하였습니다. 여와는 인류에게 손상을 입히는 흑룡을 잡아서 죽여 용사의 기를 죽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홍수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 갈대를 태워 재로 만들어 사적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막았습니다.


여와의 고생스러운 복원을 거쳐 하늘은 겨우 때울수 있었고 땅도 메웠으며 홍수도 막았을 뿐만아니라 용사맹수도 수렴하여 인류는 또다시 평온한 상태로 회복되였습니다. 하늘에 무지개가 생길때면 우리의 위대한 여와가 하늘을 메운 오색돌을 볼수 있습니다.


바둑 기원의 전설


기자는 상말의 귀족이고 상주왕의 삼촌이며 미자와 같이 유명하였고 "은말삼현"이라 불리웠다.


상주왕은 성질이 괴벽하고 포학무도하며 매일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렸으며 돈을 무절제하게 헤프게 썼습니다. 주왕의 삼촌인 기자는 주왕이 이토록 무도하여 고심 간언하였으나 되술래 주왕에 의해 수금하여 노예로 강등되였습니다.


기자는 600년동안 만들어온 강산이 주왕손에서 망칠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미친척하여 매일 "기자조"곡으로 마음속의 비통하고 분함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후 주나라 무왕이 주왕을 멸하였고 기자는 이 틈을 타서 능천으로 은거하였습니다.


기자는 능천의 기자산에서 천역적인 흑백 두가지 색갈의 돌맹이를 사용하여 점방하여 이를 이용하여 날씨를 관측하였으나 이로 인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둑이 전개하였고 이것으로 제자들과 자구 대전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한번, 간절하게 현인을 찾는 주나라 무왕은 타이항을 방문하였는데 능천에서 기자를 만났고 간절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의 가르침을 청하여 기자는 하우가 전해온"홍범구주"를 무왕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무왕은 들은후 감탄하였고 기자를 모셔 국사를 다스릴 계획이였으나 기자가 동의하지 않았음. 무왕이 돌아간후 기자는 급하게 제자와 상의 후손들을 데리고 능천 동쪽으로 떠났습니다. 그후부터 능천에는 기자가 전설이 남겨졌고 기자산 도한 차차 사람들로 부터 무기산, 무기령으로 불리웠습니다.


기자가 조선으로 간후부터 주택을 건축하고 농지를 개간하였으며 누에를 길러 베를 짰으며 도자기를 굽고 죽을 엮었고 8가지의 간단한 법률로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방지하고 해결하였으며 중국의 문화를 얼리 퍼뜨려 바둑을 사면팔방으로 전했다고 합니다


역사전고

 

후예사일


전설에 의하면 먼 옛날에 하늘에는 태양이 10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동방상제의 아들이 였는데 이 10개의 태양은 그들의 어머님, 상제의 아내와 함께 동해변가에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자주 10명의 아이를 세계 제일 동쪽에 있는 동해에서 목욕을 씻겼고 목욕후 아이들을 새마냥 한그루의 큰나무에서 서식하게 하였습니다. 태양마다 형사상의 중심이 모두 새였기에 이 큰나무는 그들의 집이 되였고 9개의 태양은 비교적 작은 나무에서 서식하였고 나머지 하나의 태양은 나무 꼭대기에서 서식하였습니다.


여명이 아침 햇살이 필요할때에는 나무 꼭대기에서 서식하던 태양이 수레차를 타고 하늘을 통과하여 세상을 비추었고 빛과 열을 세계 곳곳에 뿌렷습니다. 10개의 태양이 매일마다 번갈아 가면서 차례로 당직하였으며 질서가 정연하고 천지만물이 멋지게 조화되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지에서 행복하고 화목하며 이웃처럼 친구처럼 함께 생활하였고 해가 뜨면 생계를 도모하였고 해가 지면 휴식을 취하였으며 생활은 아주 아름답고 원만하였고 인간과 동물도 서로 화목하게 지내왔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은 태양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시진, 광명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은혜에 감동하여 자주 하늘을 향해 고두하여 읍하며 최상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 10개의 태양은 지루함을 느껴 다 같이 하늘을 주유하고 싶었고 이는 틀림없이 재미있을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명이 찾아올때 10개의 태양은 함께 수레차에 올라 하늘을 통과할 귀로에 올랐습니다. 이로 인해 대지의 사람과 만물은 모두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10개의 태양은 10개의 불덩어리와 같이 방출하는 열량이 대지를 태웠고 아주 많은 사람과 동물들을 태워 죽였습니다. 삼림이 불이 나자 모든 수목과 작물,그리고 집들은 잿더미로 태워졌습니다. 큰불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과 동물들은 사적으로 달아났고 미친듯이 재난을 피할수 있는 곳과 생명을 구할수 있는 물과 음식을 찾아 다녔습니다.


강이 마르고 바다도 마르기에 직면하고 있으며 모든 어종들이 죽었고 물속의 괴물들은 해안으로 올라와 음식을 도둑질하였습니다. 농작물과 과수원이 불에 타서 말랐고 사람과 동물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는 공급원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태양의 고온에 타죽지 않으면 야수들의 먹이가 되였으며 불바다의 재난속에서 힘겹게 몸부림을 쳤고 하느님의 은사를 간구하였습니다. 이때 젊고 출중한 대신 후예가 나타났고 그는 신전수였으며 사예가 출중하고 백발백중이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에 의해 불러갔고 태양을 몰아내는 사명을 수령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고난속에서 생활하는것을 보고 내심 참을수가 없었고 여분의 9개 태양을 쏘아 떨어뜨려 사람들을 도와 고난속에서 빠져 나갈수 있게 하도록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후예는 99개의 산을 넘고 99의 강을 건너고 99개의 협곡을 지나 동해변가에 도착하였고 큰 산을 타고 올랐으며 산밑에는 바로 망망대해였습니다. 후예는 만근 궁노를 힘껏 당겼고 천근의 화살을 올려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을 조준하여 날렸습니다. 첫번째 태양이 떨어졌습니다. 후예는 또 궁노를 당겨 화살을 올려 쏜 결과 동시에 두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 뜨렸습니다. 그러자 나머지7개의 태양은 눈을 시뻘겋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후예는 나머지 태양도 여전히 타는듯이 뜨거워 세번째 활을 쏘았습니다. 세번째 활은 힘이 아주 쎘습니다.(강했습니다) 동시에 4개의 태양을 떨어뜨리자 나머지 태양은 떨면서 허둥지둥하였습니다. 이렇게 후예는 하나하나씩 활을 쏘아 빗나감 없이 9개의 태양을 모두 떨어 뜨렸습니다. 화살에 맞은 태양들은 하나 하나씩 죽어나갔습니다. 그들의 깃털은 모두 땅에 떨어졌고 빛과 열은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나머지 하나의 태양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후예의 분부대로 착실하게 대지와 만물에게 계속하여 빛과 열을 공헌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 태양은 매일 동쪽 해변에서 솟아 저녁에는 서쪽에서 해가 졌고 세상을 따듯하게 하였으며 만물의 생존과 인간들의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일할수 있게 유지하였습니다.


개자추의 이야기


기원전 655년, 진나라의 공자 중인은 부친의 총비인 여비의 모함으로 강제적으로 한 무리의 가신들과 창황탈출하여 그로부터 망명 길에 올랐는데 그중에는 개자추도 있었습니다. 초기 중인은 도주시 자주 배불리 먹지 못하고 실오리 하나 걸치지 못하였습니다. <한시외전>에 의하면 한해는 위국으로 도망갔는데 두수라는 수종이 중인의 돈과 식량을 모두 훔쳐 깊은 산속으로 도망갔다고 하였습니다. 중인은 식량이 없고 굶주림을 참지 못해 농부들에게 구걸하였으나 음식을 구걸하지 못하였을 뿐만아니라 반대로 농부들이 흙덩이로 밥을 삼아 잔인하게 조로당하였습니다. 그후 종인은 배고품으로 쓰러질려 하자 중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개자추는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자신의 다리에서 살을 베어내 따다 놓은 야채와 함께 끓여서 중인에게 먹임으로 중인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중인은 자신이 개자추의 다리살을 먹은 사실을 안후 감동 받아 언젠가 군왕이 된다면 반드시 개자추에게 보답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인이 공경에 빠졌을때 가자추가 간뇌도지하고 지극히 충성할수 있는것은 확실히 대견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할고봉군"의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636년, 중인은 진나라 왕위에 올랐고 역사에서 진문공이라 불리웠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면서 아첨하는 한 무리의 대신들로부터 뜻을 이루어 득의양양하며 마음대로 분봉하였습니다. 개자추는 고심하여 충고하였으나 아무 쓸모 없음으로 면산에 은거하여 독선을 선택하였습니다. 진문공이 이를 알고 나서 황급히 대신들을 데리고 면산에 가서 찾아 다녔으나 개자추의 자취를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진문공은 산에 한갈래 길만 남기고 불을 지를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으로 바람이 거세지고 불살이 커지면서 수백리까지 이어졌고 그로부터 3일후 진문공은 산에 올라 찾은 결과 개자추와 어머님이 이미 불바다에 매장된것을 발견하게 되였습니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개자추가 재화를 당한 그달에 전국 집집의 화기를 엄금하고 찬음식을 먹을것을 명령하였고 오랜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이날이 한식날로 형성되였습니다.


옥산토월


소문에 의하면 고대 매년 8월 추석의 밤에 산기슭의 청련사에 콴웨팅에서 바라보면 커다란 보름달이 옥산 쌍봉사이로 나온다고 합니다. 은같은 달빛은 옥산 주변의 산, 림, 물, 돌에 반짝반짝하게 쏟아 부은다고 합니다. 옥산 쌍봉은 얇은 사와 같은 달빛에 감겨 절묘하게 지세를 부각시켜 몽롱하고 희미하여 천궁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대 영탄하는 진성의 명승지인 "옥산토월", 또 "쌍봉봉월"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차를 돌린 이야기


전설:


상전에 의하면 공자가 열국들을 두루 돌아다닐때 학술경연을 하고 정국에서의 유세가 끝난후 차를 타고 곧장 진나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가 수행 제자와 함께 진나라 변경 톈징관 아래의 작은 산골마을(현재의 산서성 택주현 진묘포진의 경내)에 도착하였을때 아이들이 석주성에서 놀면서 길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중 이름이 항탁인 개구쟁이 아이가 "차가 도시를 우회하지 도시가 차를 우회할수 없다"라며 공자에게 말했다. 공자는 항탁이 어리지만 남을 능가하는 점이 있어 그를 선생으로 모셧고 제자에게 성을 돌아 갈것을 명령하였습니다. 톈징관까지 도착하였을때 그는 입에 호두를 물고있는 다람쥐 앞에 뛰여가 인사하고 지저귀였습니다. 공자는 진나라의 개구쟁니 아이가 이와 같이 총명한 것을 보고 동물들한테도 예의를 지키는 점에 감격하여 차를 돌려 남쪽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재 톈징관촌에는 여전히 차를 돌린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후손들은 공자를 봉사하기 위하여 촌의 동만쪽에 문묘(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이 묘는 동한시기 공자의 19대 후손인 공욱이 낙양에서 관직을 맡았을때 건설한것이라고 합니다)를 지었고 "공자가 차를 돌린 자국"이라는 석비와 비각을 세웠고 행소역을 란처춘으로 이름을 고쳤고 그로부터 공자가 차를 돌린 곳이 진성의 유명한 4대 경관중의 하나가 되였습니다.


여와가 하늘을 메우다


전설:


여와는 중국 역사 신화 전설중 여신중의 한명이고 복희와 남매입니다. 인간의 머리이고 뱀의 몸뚱이이고 예전에 오색석을 녹여 하늘을 메웠다고 흙으로 사람을 빚어 냈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예절을 만들어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고 세상 만물을 조화하였습니다. 여와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그는 자상하게 우리를 만들었고 용감하게 우리가 천재를 당하지 않게 보살폈습니다. 민간에서 광범하고 오랫동안 숭배할수 있는 창세신이고 시조신입니다. 그는 신통력이 무궁무진하여 만물을 화생하였고 매일 적어서 70가지 물건을 만들어낼수 있습니다.


태고시대에 수신공공과 화신축융은 사정으로 인해 다투다가 크게 싸웠습니다. 마지막 축융은 싸움에서 이겼고 수신공공은 부끄럽고 분하여 서쪽의 부주산을 들이 받았으나 부주산은 하늘을 지탱하는 기둥이였습니다. 부주산이 파열되면서 하늘과 땅사이를 지탱하던 기둥이 무너졌고 하늘의 반쪽이 붕괴되였고 큰 구멍이 생겼고 땅에고 갈래갈래의 금이 생기면서 삼림은 큰불이 일어나고 홍수가 땅속에서부터 마구 솟아 올라왔으며 용뱀맹수도 나와 인간을 삼켰습니다. 인류는 공전의 대 재난에 직면하게 되였습니다.


여와는 인류가 이와 같은 뜻밖의 재난을 겪고 있는것을 보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하늘을 메워 재난을 끝낼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여러가지의 오색 돌맹이를 모아 불로 녹여 이것으로 하늘의 구멍을 메울것으로 결정하였고 큰 거부기의 네 다리를 세워 무너진 하늘을 지탱하였습니다. 여와는 인류에게 손상을 입히는 흑룡을 잡아서 죽여 용사의 기를 죽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홍수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 갈대를 태워 재로 만들어 사적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막았습니다.


여와의 고생스러운 복원을 거쳐 하늘은 겨우 때울수 있었고 땅도 메웠으며 홍수도 막았을 뿐만아니라 용사맹수도 수렴하여 인류는 또다시 평온한 상태로 회복되였습니다. 하늘에 무지개가 생길때면 우리의 위대한 여와가 하늘을 메운 오색돌을 볼수 있습니다.


바둑 기원의 전설


기자는 상말의 귀족이고 상주왕의 삼촌이며 미자와 같이 유명하였고 "은말삼현"이라 불리웠다.


상주왕은 성질이 괴벽하고 포학무도하며 매일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렸으며 돈을 무절제하게 헤프게 썼습니다. 주왕의 삼촌인 기자는 주왕이 이토록 무도하여 고심 간언하였으나 되술래 주왕에 의해 수금하여 노예로 강등되였습니다.


기자는 600년동안 만들어온 강산이 주왕손에서 망칠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미친척하여 매일 "기자조"곡으로 마음속의 비통하고 분함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후 주나라 무왕이 주왕을 멸하였고 기자는 이 틈을 타서 능천으로 은거하였습니다.


기자는 능천의 기자산에서 천역적인 흑백 두가지 색갈의 돌맹이를 사용하여 점방하여 이를 이용하여 날씨를 관측하였으나 이로 인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둑이 전개하였고 이것으로 제자들과 자구 대전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한번, 간절하게 현인을 찾는 주나라 무왕은 타이항을 방문하였는데 능천에서 기자를 만났고 간절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의 가르침을 청하여 기자는 하우가 전해온"홍범구주"를 무왕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무왕은 들은후 감탄하였고 기자를 모셔 국사를 다스릴 계획이였으나 기자가 동의하지 않았음. 무왕이 돌아간후 기자는 급하게 제자와 상의 후손들을 데리고 능천 동쪽으로 떠났습니다. 그후부터 능천에는 기자가 전설이 남겨졌고 기자산 도한 차차 사람들로 부터 무기산, 무기령으로 불리웠습니다.


기자가 조선으로 간후부터 주택을 건축하고 농지를 개간하였으며 누에를 길러 베를 짰으며 도자기를 굽고 죽을 엮었고 8가지의 간단한 법률로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방지하고 해결하였으며 중국의 문화를 얼리 퍼뜨려 바둑을 사면팔방으로 전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