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물문헌

문물문헌

 

청동
一、도철문정(상)


도철문정은 높이가 73㎝, 구경이 47.5㎝입니다. 1990년 평륙현전장에서 출토하었습니다. 용기는 소박하고 거대하며 무늬장식이 깔끔하며 산서에서 출토된 용기중에서 가장 이른 상대의 청동 용기입니다. 정 아래 부분의 담배 그을음 흔적과 출토 지점으로 분석할때 "강에 제사"하는 물품일것으로 추측합니다.


二、효유(상)


효유의 높이는 19.7㎝이고 구경의 제일 넓은 곳은12㎝이고 제일 좁은 곳은 8.6㎝이며 너비는 13.4㎝이고 일종의 주기입니다. 1956년 석루현의 알랑파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효유형은 두마리의 올빼미가 반대면으로 서있고 머리가 뚜껑이고 몸뚱이가 용기이며 눈이 둥글고 부리가 뾰족하여 위무가 위엄합니다. 실용적인 용기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상대 말기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입니다.


三、진후소종(서주)


진후소종의 높이는 25.9㎝이고 선의 간격이 14.9㎝이며 1992년 곡옥현 북조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진후소종은 모두 16개로 그중 14개는 상해박물관이 해외에서 구입하여 소장하였으며 나머지 2개는 진후 묘지의 8호 무덤에서 출토하였습니다. 하나는"년무강, 자자손손"7자가 있고 다른 하나는 "영보자종"4자가 씌여 있습니다. 명문은 모두 참으로 새긴것으로 서주 청동 용기중 최초로 보게 된것입니다. 기록된 전쟁은 사료에 기재 된것으로 서주와 진나라 역사의 연구에 아주 중요합니다.


四、조개인족화(서주)


조개인족화의 높이는 34.6㎝이고 1992년 곡옥현 북조촌 진후묘지의 31호 무덤에서 출토하였고 무덤의 주인은 진선후부인입니다. 이 용기의 조형이 특이하고 구상이 독특합니다. 라체의 사람이 용기를 메고 비조가 두껑을 덮고 용모양의 흐름과 짐승머리의 손잡이, 귀여운 아기곰이 비조를 꼭 쥐고 있는…평면에서 음각에서부터 입체 조각, 기하학에서부터 상생, 선인에 대한 상속이 있고 창조적인 발전도 있으며 절대로 일반 장인이 만들수 있는 공예가 아닙니다.


五、조존(서주)


조존의 높이는 39㎝이고 길이는 30.5㎝이며 너비는 17.5㎝입니다. 1992년 곡옥현 북조촌 진후 묘지 114호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전체적인 조형은 머물러 고개를 돌린 봉조형이고 봉황 꼬리 부분은 코끼리 머리처럼 구부러졌으며 두발과 함께 안정된 3개의 지탱점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조형은 있는 그대로 생동하게 묘사하였고 구상이 독특하고 장식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보기 드문 예술 진품입니다. 용기의 뚜껑과 복부 밑바닥에 "진후작향태실보존옹"이라는 명문이 새겨졌음으로 종묘 제사때의 예기라는 것을 설명할수 있습니다.


六、진후신근호(서주)


진후신근호의 높이는 68.8㎝이고 폭은 35.2㎝입니다. 1992년 곡옥현 부조촌 진후 묘지 8호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모두 두개이고 형태, 무늬, 명문은 거의 같습니다. 조형이 특이하고 웅흔하며 무늬가 화려하고 유창합니다.뚜껑내에 4줄 26자 "유구월초길경오, 진후신근작존호, 용향우문조황고만억영보용"으로 주명되여 있습니다.


七、입조인족통형기(서주)


입조인족통형기 높이는 23.1㎝이고 통의 직경이 9.1㎝입니다. 1993년 곡옥현 북조촌 진후 묘지의 63호 무덤 주인 진목후 두번째 부인의 묘지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형태가 특이하고 청동중 처음 본것입니다. 날개를 치며 서있는 새를 입체 조각으로 손잡이를 만들었습니다. 뚜껑과 구연에 각기 한쌍의 관이가 있습니다. 아래 부분에는 사각 좌석이 있고 사면에 사람모양의 족이 각기 하나씩 있습니다. 사람은 나체이고 상투가 높이 솟았으며 몸을 웅크려서 힘쓰는 상태로 하였습니다. 좌석내에 2개의 방울이 있으나 그의 기능은 진일보의 연구가 필요합니다.


八、월인 우리차 간수(서주)


월인 우리차 간수의 높이는 9.1㎝이고 길이는 13.7㎝이며 너비는 11.3㎝입니다. 문희현 상곽촌에서 출토되었고 화물 6륜차입니다. 차량 좌측에는 왼쪽 발을 월각한 나체 "월인"이 서있고 위에는 들수 있는 뚜껑이 있습니다. 차 전신에는 원숭이, 새, 호랑이 등 동물들이 있고 금수를 양육하고 있는 우리를 상징하고 전차는 회전할수 있는 부분이 15곳이며 구사이 특이하고 제작이 정교하며 보기 드문 작품입니다.


九、동희입인경판(전국)


동희입인경판은 높이가 14.5㎝이고 길이가 18㎝이며 접시의 직경이 14㎝이며 중량이 1.38㎏입니다.1965년 장치시의 분수령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동희는 머리와 귀를 쳐든 신수이고 등에 여자가 서있었으며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왔습니다. 두팔은 앞으로 뻗어 원기둥을 잡고 있고 기둥 위에는 회전이 가능한 투각한 구불구불한 독사 모양의 둥근 접시가 있습니다. 이 용기의 조형이 기이하고 매끄럽고 우아하며 무늬 장식이 화려하고 공예가 훌륭하며 중국 청동기의 제작 기술의 탁월한 수준을 구현하였습니다.


十、10.호부온주준(한)


호부온주준의 높이는 24.5㎝이고 구경은 23.4㎝입니다. 1962년 우옥현 대천촌에서 출토하였고 모두 두개이며 형체가 비슷하고 전신을 금으로 도금하였습니다. 뚜껑 중심에는 들어올릴수 있는 고리가 있고 주변에는 3개의 봉황이 있으며 곰발 모양이 다리가 3개 있습니다. 전신은 상하 두층으로 나누는데 동물의 무늬인 호랑이, 양, 낙타, 소, 원숭이, 용, 봉황 등 신비한 동물 10여가지를 부각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북방의 초원 문화 특색이 있을 뿐만아니라 중원의 우아함까지 겸비하였으며 한대 청동 예술과 기술의 모범적인 작품입니다.


석조


1.웅크린 호랑이 입체 조각(한)


웅크린 호랑이의 입체 조각은 높이가 71㎝이고 길이가 134㎝입니다. 1957년 운성시 안시촌에서 채집되였습니다. 통석재로 모양에 따라 조각하는것은 한대 동물 석조의 보편적인 특점이였습니다. 본 웅크려 앉은 석각 호랑이는 소박함 속에 대범이 묻어납니다. 작가는 호랑이의 큰입, 날카로운 이와 예리한 발에 대해 가공하였고 백수의 왕의 용맹한 위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2.석조 초석기둥(북위)


초석기둥의 높이는 165.㎝이고 밑바침대는 32㎝이며 기둥 구멍의 직경은 7㎝입니다. 대동시 석가체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태화8년(기원 484년)사마금용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초석기둥은 위가 둥근모양이고 아래가 네모 모양이며 원형 복분의 조각이 정교롭고 군산 사이에 교룡이 지나가고 활짝핀 연꽃에는 원주 구멍을 조각하였습니다. 구상이 정교하고 영롱합니다.


3.급박을 입힌 채색 석가좌상(북제)


좌상의 높이가 40㎝이고 1954년 태원시 화탑촌에서 출토하였습니다. 석가좌상은 연꽃좌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개를 들고 있고 볼이 풍윤하고 웃음 띤 얼굴이 평온하고 고요하며 즐거워하는 모양이 였고 뒤에 두광을 조각하였습니다. 좌상과 연꽃 좌석은 채색과 금박을 입혔고 가사는 하단을 안으로 넣었으며 쌍구무늬는 좌석까지 내려왔습니다.


4.석가 칠존상(북제)


상의 높이는 46㎝이고 1954년 태원시 화탑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석가상은 연꽃 좌석에 앉아있고 전신에 금박과 적홍채를 입혔습니다. 배모양의 후광 주변은 보탑, 비천을 부각하였고 좌석은 연꽃 모양을 부각하였으며 화생 박생로를 공급하였으며 불단 뒷면의 불상을 채색하였습니다. 전체 불단의 조각 법도가 엄격하고 작식이 휘황찬란하며 헌거롭고 산서 북제에서 제일 정교로운 석가 칠존상입니다.


5.석가두상(북제)


두상의 높이는 33.5㎝이고 1954년 태원시 화탑촌에서 출토하였습니다. 한백옥 부처님 머리, 나발이 높이 솟았고 얼굴의 윤곽이 우아하였습니다. 살짝 감은 두눈, 우뚝 솟은 콧날, 감미로운 얇은 입술과 내성적인 미소지은 입가는 온화하고 점잖으며 귀한 티가 나고 기질이 고결하며 정신이 완비되여 있는 위대한 남편의 이미지였습니다. 정교롭고 뛰어남으로 출토후 줄곧 당대의 걸작이라 오해하였으나 사실은 북제 불교 조상중의 정제품입니다.


6.한백옥 석곽(일부)(수)


삭곽의 높이는 217㎝이고 길이는 295㎝이며 1999년 태원시 왕곽촌에서 개황 12년(기원592년)우홍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우홍은 중아 우국인이고 북제시 入华하였고 북제, 북주와 수에서 직무를 맡았었습니다. 순은 중국과 서양의 장점을 융합하였고 부각 색채가 아주 정교롭고 아름다웠습니다. 내용으로는 주연, 악무, 사냥, 거실, 여행 등 그림이 있고 페르시아의 배화족과 연관이 있는것이 분명합니다. 화면의 인물, 장면, 기구와 초목 등은 모두 선명한 중앙 아시아의 풍정과 예술 수법을 볼수 있었습니다. 고대 비단의 연구의 길과 중화 문화 교류에 중용한 의의를 자기도 있습니다.


7.금박을 입힌 채색화 보살 입상(당)


보살 입상의 높이는 57㎝이고 1954년 태원시 화탑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보살은 "S"형으로 약간 경사지게 원형 좌석에 서있었고 자태가 얌전하고 고왔으며 상반신을 드러냈고 매끄러운 왼쪽 어깨에 견직띠를 걸치고 있었으며 하체의 치마 자락은 가볍고 부드러웠고 윤곽이 유창하고 질감이 뛰어났으으나 아쉽게도 금박과 채색은 거이 모두 탈락하였습니다.


8.열반변상비(당)


비의 높이는 302㎝이고 너비는 97㎝이며 1957년 임의현에서 모집되였습니다. 천수2년(기원591년)제명하였습니다. 전비는 열반 이야기를 위주로 하였고 난타공양, 쌍수열반, 위모설법, 쌍족현성, 송장, 분관과 천계기탑이 있습니다. 아래층에는 시주의 성명을 부각하였고 비신에는 부각이 가득 장식되었고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구도가 치밀하고 조각이 세밀하며 비교적 높은 예술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9.보살 입상(당)


상의 높이는 112㎝이고 태곡현의 백성촌에서 모집되었습니다. 청석 입상은 머리와 팔이 잔간되었으나 근육과 골격의 부각이 아주 정확하였습니다. 신체 조형은 변화가 강한 "S"형을 채용하여 더욱 생동하고 우아합니다. 풍만한 피부와 약간 볼록한 관둔, 유창한 라인은 청춘의 활력과 생명의 질감이 충만하여 성당 불교 예술의 대표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산서문물 도자기


1、 채도관(신석기 시대)


채도관은 문물입니다. 높이는 45.8㎝이고 구경은 35.5㎝이며 밑바닥의 직경은 15.5㎝입니다. 예성현 금성장에서 출토하였습니다. 흙질의 홍도이고 관의 입구가 크며 밖으로 접어 졌으며 복부가 기울어지고 바닥이 평평합니다. 채도관 표면은 검은색의 직선과 곡선이 조합하여 삼각무늬를 이루었고 무늬 장식의 구조는 설계가 교묘하고 선이 간결하고 유창합니다.


2、채색반룡판(신석기 시대)


채색반룡판은 신석기 시대의 문물로 높이가 7㎝이고 구경이 36.5㎝이며 양분현 도사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도자기 판의 내벽은 홍채로 구불구불한 반룡을 묘사하였고 머리는 판구의 변두리에 있고 꼬리는 판의 중앙에 있으며 뱀모양의 기린몸이고 사각머리와 둥근 눈이고 큰입을 벌려 긴 혀를 내밀었으며 신체기 포만하고 밖으로 벌렸으며 평온하고 강건하였습니다.이는 뱀 같기도 하고 악어 같기도 하며 두가지 혹은 두가지 이상의 동물 특징을 한몸에 가진게 분명합니다. 반룡은 가화를 입에 물었고 가화는 아주 튼튼한 벼 이삭입니다. 고대에서 이를 서조를 상징한다 하였습니다. 이 도안은 한 방면에서 도사의 선민이 용에 대한 숭배를 반영하였고 또한방면에서 도사 반룡은 고급적인 대규모의 무덤에서만 존재하는것으로 예기로 사용했을거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3、회도실무늬란복삼족옹(하조)


회도실무늬란복삼족옹은 하조의 문물이고 높이는 72㎝이고 복경은 60㎝이며 1956년 태원시 광사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흙질은 회도이고 전신이 밧줄 무늬이며 또 계란형 항아리라고도 부릅니다. 영원은 앙소 문화의 뾰족한 밑바닥인 병과 허타오 지역의 토착 문화 계란형 항아리입니다. 이 항아리는 착지가 평온하고 통풍과 습기 방지에 유리하여 아주 실용적입니다.


4、호인무용(북제)


호인무용은 북제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25㎝이고 1972년 수양현 가가장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태녕2년(기원562년) 사적회락모에서 발굴되었습니다. 호인 노인 한명이 머리에 적홍색 선형 모자를 쓰고 적홍색 왼쪽 옷깃이 열린 타이트한 긴 적삼과 흰바지에 선형 신을 신고 있었습니다. 높은 코와 깊은 눈, 볼 수염, 얼굴에 온통 주름살이고 얼굴에 웃을을 머금고 있었으며 노래와 춤을 한껏 즐기듯이 활달하고 호방한 성격이 넘쳐 흘렀습니다.


5、백자인수병집호(당)


높이는 31.2㎝이고 구경은 9.8×5㎝이며 복경은 15㎝이고 밑바닥의 직경은 7.7㎝이며 1965년 태원시 석장두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항아리의 손잡이와 구연은 줄기가 있는 연꽃에 형사하고 인수를 장식하였습니다. 중국의 도자기 예술은 페르시아의 금은기를 소조하여 만들었으므로 중국과 서양의 장점을 융합하여 이국 분위기를 부유하고 있습니다.


6、백자 누공훈로(송조)


백자 누공훈로는 송조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11.6㎝이고 구격은 6.1㎝이며 밑바닥의 직경은 4.4㎝이며 1958년 태원시 금승촌에서 출토하었습니다. 로내에 향을 태울시 향연이 모락모락 피여 오르고 누공에서 나오고 있어 실용적이기도 하고 보기도 좋습니다. 태질이 부드럽고 백유가 순백하며 산서의 지방요-개휴요의 제품입니다.


7、백자 갈채 모란무늬합(송조)


백자 갈채 모란무늬합은 송조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3.2㎝이고 구경은 11.7㎝이며 1958년 태원시 금승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자모구 원형 편합, 백유가 누렇습니다. 뚜껑면의 바깥쪽 무늬는 갈색 권초 무늬이고 안쪽에 갈색 국화를 묘사하였으며 소박하고 담백하며 자주요 제품입니다.


8、흑유 녹화 장경병(금대)


흑유 녹화 장경병은 금대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28.5㎝이고 구격은 7.5㎝이며 복경은 16㎝입니다. 1983년 류린현 쉐춘에서 출토되었으며 조형이 전아하고 전신을 흑유를 발랐으며 복부에 철녹색의 풀잎무늬를 묘사하였으며 간결한 필치로 무심코로 보였으나 흥미진진하였습니다. 풀잎이 흑유속에 침투되였고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으며 침착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을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특색을 갖춘 산서의 흑자 장식입니다.


9、이십사효 도기 공예(금대)


이십사효 도기 공예는 금대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10- 28㎝이고 길이가 21-28㎝이며 지산현 마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십사효의 이야기는 금원시대때 성행하였고 내용의 조합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본 이십사효 도기 공예는 모두 24개로 인물이 생동감 있고 흔히 얻기 어려운 예술 진품입니다.


10、황녹유반룡대로 (명나라)


황녹유 반룡 화로(명대)   황녹유 반룡 화로는 명대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73㎝이고 구경은 53㎝이며 1953년 수집한 정석 화로입니다. 협사도,평염,직경,고복,둥근 밑바닥. 어깨 양측에 장방형의 한쌍의 귀사 있고 귀가 밖으로 기울고 교룡머리모양의 발, 전신을 황녹색유를 바르고 구연과 양귀는 구슬 무늬를 묘사하였습니다.본 화로의 태체가 두껍고 유색이 묵직해보이고 이미지가 장엄합니다.
  

1.옥매(상대)


높이가 10.3㎝이고 너비가 4.3㎝이며 1993년 곡옥현 북조촌에서 출토하였습니다. 진후 묘지 63호 무덤에서 발굴되였고 상대의 유품입니다. 입체조각 입매, 건강하고 힘찬 체형, 기민한 표정. 머리에는 소룡이 있고 입은 크게 벌리고 있으며 매두의 돌기물을 물고 꼬리는 위로 올려 마치 응관 같았으며 선이 능숙하고 유창하며 무늬 장식이 정교합니다.


2.옥인(상대)


높이는 9.7㎝이고 1993년 곡옥현 북조촌에서 출토되었으며 지후 묘지 63호 무덤에서 발굴되였고 상대의 유품입이다. 사람의 형체를 입체 조각으로 만들었고 긴 얼굴과 넓은 턱, 넓은 코와 큰입, 짙은 눈섭과 큰눈. 머리는 뿔모양으로 하였습니다 주먹을 잡고 구부리고 서서 허리쪽에 용모양의 기를 달았으며 네모 신발 아래에 편상 사개가 있어 원래 모 물건에 꼽혀 있었다는 것을 표명합니다. 조형과 차림새로 볼때 모종의 요술이 함의가 있습니다.


3.옥조(상대)


높이는 6.9㎝이고 너비는 3.8㎝이며 1993년 곡옥현 북조촌에서 출토되었으며 지후 묘지 63호 무덤에서 발굴되였고 상대의 유품입이다. 옥의 재질이 투명한 입체 조각 올빼미는 체구가 정면으로 되여 있고 날개가 거이 네모 모양이고 날개를 펴고 샤냥감을 향해 날아가는 자태로 판단됩니다. 조각이 정교하고 상대 옥기 중의 명품입니다.


4.옥조패(서)


최대 황장이 15.8㎝이고 1993년 곡옥현 북조촌에서 출토되었으며 지후 묘지 63호 무덤에서 발굴되였고 황장, 옥형, 옥관, 료주, 마노 등으로 구성되였으며 모두 204개가 있습니다. 최대 황장은 15.8㎝ㅇ고 전체의 옥조패를 펴면 2m에 달하며 무늬 장식은 씽구법을 많이 썻으며 공예가 정교합니다. 아래쪽 옥기러기는 머리를 쳐들고 날개를 펼치고 있으며 생동하고 활발합니다.


5.옥양(서주)


높이는 2.5㎝이고 길이는 5㎝이며 1993년 곡옥현 북조촌의 진후 묘지 63로 무덤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청백옥의 입체 조각이고 양은 웅크리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며 큰 뿌리는 안으로 감아 들었습니다. 조형이 간명하고 생동하며 머리, 등, 꼬리에 튀어나온 척추릉이 있어 장식효과와 서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6.옥사슴(서주)


높이는 8.3㎝이고 너비는 5.9㎝이며 1993년 곡옥현 북조촌의 진후 묘지 63로 무덤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사슴은 고개를 들고 관망하고 있고 막 출발하는 자태이며 눈이 둥글고 귀가 크며 가슴은 펴고 등은 웅크렸으며 진퇴간에 망설이고 있는것처럼 보였고 전체적이 조형이 과장되고 개괄되였으며 사슴의 이미지와 성격 특점을 잘 장악하였고 간련하고 표현력이 강합니다.


7.옥당랑(서)


길이는 7㎝이고 1993년 곡옥현 북조촌의 진후 묘지 63로 무덤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백옥이 편으로 조각되였고 큰당랑과 작은 당랑 두마리가 있으며 큰것이 위에서 작은다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보통"모자강의 깊은 정"이라 생각하지만 "부부의 결별"의 가능성이 더욱 큽니다. 암컷의 자태가 훤칠하고 복부가 크고 꼬리가 넓습니다. 암컷은 몸을 구부려 "죽음에 이렀습니다". 전체적인 형상이 진짜같이 보였고 생동하고 재밋습니다.


8.옥인(서주)


높이가 9.1㎝이고 너비가 3.3㎝이며 1992년 곡옥현 북조촌의 진후 묘지 8로 무덤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얇은 형태와 서있는 자세였으며 전체적으로 억벤 칼질로 음선 윤곽을 조각하였고 눈섭이 진하고 눈이 크여 코가 넓고 입이 납작하였습니다. 옷깃은 세워져 있었고 좌측아래의 소매가 약간 열렸으며 허리를 몪고 아래는 제형으로 되고 중간에는 화살촉 형이 폐슬하며 좌우측의 발꿈치가 이어져 있었고 발끝은 밖으로 들려있었습니다. 옥인의 뒷골에는 생머리가 보였고 머리에는 쌍용 무늬의 장식을 하였으며 두개의 용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고 중간에는 투각하였으며 윗쪽을 굽혀서 천공하였습니다. 이러한 머리 장식품은 보기가 아주 드믐니다.


9.용형 옥패(춘추)


1988년 태원시 금승촌 조경의 무덤에서 출토되었고 전신이 곡무늬로 되었으며 춘추말기의 용무늬의 전형적인 양식입니다.


10.보석묘금완(청조)


높이가 6.9㎝이고 구경이 12.2㎝이며 건륭시기의 작품입니다. 사발밑에 깨진 보성으로 꽃잎이 서로 뒤엉킨 도안을 만들었고 내벽은 석류무늬이며 변두리를 모두 금박을 입혔으며 옥완의 가공이 정교하고 장식 공예가 독특하며 무늬의 장식이 화려합니다.


산서문물 잡항


1.삼릉대첨장치(구석기 시대)


길이는 21㎝이고 너비는 10.5㎝이며 양분현 정촌에서 출토되어 흔히 "정촌 첨장치"라 부르고 10만년전 분하유역 구석기 문화의 재표적인 도구입니다. 형체는 서방 동기의 “손도끼”와 비슷하고 편석을 한 방향으로 가공하여 만들어 진것입이다. 삼릉의 세면은 장엄하게 대칭되고 사용 기능과 예술을 겸비하였습니다.


2.합질 천공 장식품(구석기 시대)


길이가 1.38㎝이고 너비가 1.14㎝이며 두께가 0.24㎝이고 2001년 길현 쓰스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방합 껍질을 부스려서 아이의 면형을 만들었고 한 방향으로 구멍을 뚫어 두 눈을 만들었으며 선을 조각하여 눈섭모양으로 하였습니다. 진주 색채가 작은 얼굴에 빛을 더했고 깊은 눈은 어린아이의 정취가 가득하였으며 요원한 심미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3.후마맹서(춘추)


1965~1966년 산서 후마시 진국 유적지에서 출토되었고 춘추말기에서부터 전국 조기 진 국경어르신이 맹세를 할때의 약신 문서 "재서"라고도 합니다. 문자는 주필로 옥석편 위에 씁니다. 모두 5000여개이고 식별이 가능한것은 650여개입니다. 규형, 원형, 불규칙형이 있고 보통 주홍색으로 쓰고 소수는 흑색으로 씁니다. 그 내용은 종맹류, 위질류, 납시류, 자주류, 복서류로 나누고 이의 발견은 고대 맹세 제도와 진국의 역사 및 고대 문자의 연구에 대해 중대한 의의가 있습니다.


4.목판 칠화(북위)


매 덩이의 길이는 82㎝이고 너비는 20㎝이며 대동시 석가제 사마금용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칠화 병풍이고 모두 5개가 보존이 비교적 완정합니다. 판면에 주칠을 칠하였고「열녀전」의 채색화 입니다. 화풍은 진 고개지입니다. 머리말과 글의 글자체는 예서체와 해서체 사이에 있고 기세가 명랑하고 보기 드문 묵적 입니다. 목판 칠화는 남북조 시기 문화 융합의 산물이고 역사와 예술가치가 아주 높습니다.


5.누예모 벽화(북제)


높이는 160㎝이고 태원시 완곽촌 북제 무평원년(570)누예모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누예모 벽화는 현재 200여 ㎡ 남아있고 기세가 장관하고 기예가 정세하여 북조 회화의 최고 수준을 대표하고「출행도」의 인물이 주와 부를 구분하고 말의 표정이 각기 다르며 동정을 결합하여 현실주의의 풍격이 가득합니다.


6.금에 보석을 박은 반지(북제)


반지 면의 직경이 2.89×2.59㎝이고 테원시 왕가봉톤 무평2년(571)서선수의 무덤에서 출토하었습니다. 두마리의 괴물이 신체가 연결되여 반지를 형성하였고 머리와 버섯모양이 연결되고 반지 면에 파란 보석을 박아 넣었으며 머리에 높은 모자를 쓰고 양손에 각기 장형기를 든 사람을 음조하였으며 동작은 무용을 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전체적인 장식은 화려하고 호화하였으며 중,서아 심지어 더욱 먼 박래품입니다.


7.대반야바라밀다경(송개보5년, 기원972년)


권축장이였고 길이는 745㎝이고 판틀은 32.3×47.5㎝였으며 모두 600원이지만 1권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965년 산서성 능천형 단진화 선생께서 기중한것입니다. 「대반야바라밀다경」권의 260위「소장품을 열다」는 0권, 강황색 장경지, 권축장, 모두 26지, 제1지부터 제10지까지 부족합니다. 제 11지 16번째 줄 , 줄14자, 제26지 12줄, 줄 14자, 기타는 매지 23줄, 줄 14자이고 판틀의 높이는 32.3㎝이고 종이의 길이가 47.5㎝이며 제일 마지막 종이의 길이는 47.5㎝입니다. 권말에 "대반야바라밀다경권 제260"및 "대송개보5년 임신세 봉칙 제조"라고 씌여 있고 아래쪽에는 "루융인"으로 작은 장방형의 묵인이 있습니다. 「대반야바라밀다경권」제260, 북송개보5년 사천 성도에서 조각되었고「고서의 등급 결정 표준」에 의하면 1급 고서로 확정되었고 국가 진귀 고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8.「숭녕만수대장경」 (북송)


석지화 저작, 경첩장, 판형은 0.2×11.2㎝이고 판틀은 24×66.6㎝이며 모두 6434권이나 현재 14권이 보존되여 있습니다. 산서성 박물관「숭녕만수대장경」14권이 소장되여 있습니다. 금자 헤서로 제첨하였고 장경지로 인쇄하였으며 권두에「고산대장」이라고 해서 주문방인이라 날인하였습니다. 판막에 흑색의 작은 장방형으로 날인하였습니다. <숭녕만수대장경> 또는 동선사 대장이라고도 부르는데 복건 고산 융췐을 위해 청인하였으며 동선사에서 판을 조각하고 북송 원풍3년 (기원1080년)에서부터 정화2년(기원1112년)복건 동선사 등에서 간행하였음으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사각한 대장경입니다. 현재 14권이 보존되여 있고「고서의 등급 결정 표준」에 의하면 1급 고서로 확정되였고 국가 진귀 고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9.정우보권50관지폐판(금대)


길이는 33㎝이고 너비는 19㎝이며 1978년 신강현 량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지폐면 상방의 50조 돈뀌미 도안은 50관을 표시하고 현재까지 발견된 금대 지폐판중에서 최고로 정교한 지폐판입니다. 기타 지방에서 나온 정우보권"제로통행"과 달리 지폐면에는 "평양태원부 두갈래길 통행"문구로 씌여있습니다. 얻기 어려운 진품입니다.


10.홍무금괴(명조)


길이는 9.4㎝이고 양쪽의 너비는 5.6㎝이며 두께는 2.5㎝이고 중량은 1946g입니다. 1972년 태원시 황릉촌 명릉왕 목릉원내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괴면에는 "로부홍무23년 가을걷이 양식금 50냥5서푼 절수"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금괴의 출토는 과거의 중국 황금은 대괴사 없었다는것을 수정하였습니다.    


문 헌


1.「귀진천문집」


29권, 명대 귀유광 작품, 문인 완집예 교정, 명 만력 4년 옹량유우금당 간본.


책앞에 “귀선생문집 소인”을 첨부하고 서명에는 전서 주문 장방인이 두개 있고 인문은 “쌍감루장서인”, “배덕재진장인” 이고 뒤에는 “만력 3년 10월기 망문생주시 배서”가 있으며 문집목록서명에는 “쌍감루”전서 주문인이 있습니다. 이 본의 종이는 백묵흑이고 행격이 명랑하고 반장에 10줄, 20자, 백구, 단어미, 사주쌍란입니다. 책배 밑의 인판에는 “우금당”이 조각되어 있고 매책권수의 서명에는 모두 장방전서주문인 “쌍감루”가 찍혀있습니다. 권미의 서명에는 삼방전서인이 있고 인문은 1백, 2주로서 차례로 “충막독서”, “배덕재진장인”, “부원숙장서인”입니다. 이런 장서인에서부터 이 문집은 근대의 유명한 장서가, 목록판본학가 부증상의 장서임을 판단할수 있습니다. 매권의 책에는 모두 청대 유명한 장서가 전겸익선생의 붉은필로 권점을 찍어 평어와 주해를 단것이 있습니다. 일부 권에는 붉은 필로 직접 각본에 문자 교정을 하였습니다.


2.「예장선생문집」


책앞에 근대 유명한 장서와 판본목록학가 부증상이 경진하 (1880년) 6월 6일에 쓴 제발이 있습니다. 발중에서는 이 본의 내용과 판각 경력, 판본의 좋고나쁨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발후에는 전서 백문 소방인 “부증상”이 찍혀 있으며 이 본의 반장은 13줄, 23자, 흑구, 단어미, 사주 쌍란입니다. 권수의 서문은 이미 존재하지 않고 앞부분은 예장라 선생의 년보이고 권단 서명후에는 전서 주문인이 있고 인문은 차례로 “배덕재진장인”, “밀암장서”이며 아래에는 “진사 조도진 변차 교정, 후학사란 재교정 각인”이 있습니다. 그다음은 목록으로 총 17권으로 나뉘였고 뒤에는 부증상선생의 일방전서 주문인 “충막독서”가 있습니다. 매권에 서명후 전서 주문인이 있고 인문은 차례로 “쌍감루장서인”, “밀암장서”입니다. 이 장서인감으로부터 이 본은 부증상 “쌍감루”의 장서임을 알수 있습니다. 부증상선생의 제발상 판각의 흐름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부터 이 본은 명나라 가정33년 사란이 다시 교정하여 각인한 본임을 알수 있습니다. 좁은 줄과 가는 글씨, 맑은 글씨체, 아름다운 서묵, 정교한 조루를 보아 원본으로 판단됩니다.


3.「이십일사」


18사 보관, 명만력 24년 내지 34년 북경 국자감각본, 명말 청초 부산선생의 비고주석이 있습니다.


이 판식은 완전히 일치한바 모두 좌우 쌍란, 단어미입니다. 반장에 10줄, 21자, 백구 대자, 행격이 명랑합니다. 글씨체는 방방정정한 방송자로서 단장하고 정중하며 도법이 투철하고 수수하면서 고풍스럽고 조각이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매책 권수의 서명에는 모두 전서 백문인이 있고 인문은 “부산지인”입니다. 매권에 거의 모두 부산선생이 붉은색, 검은색 모필로 권점을 찍어 평어와 주해를 단것이 있습니다. 주해에는 소해서가 있기도 하고 행초서가 있기도 하며 서책의 표지에 있기도 하고 또 책의 윗부분에 있기도 하며 변백 중봉에 있기도 합니다. 그의 주해는 짧은것도 있고 긴것도 있어 한가지 틀에 매어있지 않으며 내용에 대한 개요가 있는가 하면 또 인물 혹은 사상에 대한 평론도 있습니다. 책속에는 각종 부호도 그려져 있습니다. 일부 책장에는 권점을 찍은것이 밀집되어 줄들이 끊임없고 동그라미안에 또 동그라미가 있고 줄밖에 줄이 있습니다. 부산선생은 우리나라 명말 청초의 유명한 서법가입니다. 그의 서법예술은 조예가 매우 깊은바 해서, 초서, 예서, 전서 모두 가능하고 이중에서도 행초서가 가장 유명합니다. 이 본에 부산선생의 권점을 단 평어와 주해가 있기에 이를 통해 부산서법의 예술적 매력을 감상하는것도 매우 진귀합니다.


4.「북송 복주 동선등각원 간본 대장경」


산서성박물관에 14권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장경의 간인은 선후 30여년을 거쳐 주지 혜공대사 충진, 전법 자지지화, 승 계장, 전법 사문 지현, 전법 광혜대사 달과 등 다섯명의 손을 거쳤고 진신, 왕흥, 왕혜, 이의 등 네사람이 인조하였습니다.


이 장경은 모두 군청색 경지피이고 경절본이며 높이 30.2센티미터, 너비 11.2센티미터이며 매 판에 3개, 매 개에 12줄, 매 줄에 17자이며 금자 해서를 쓰고 장경지, 단란, 목각구 또는 염체입니다. 첫장에 “거산대장” 해서 주문방인이 찍혀있고 판 끝부분에 인조자 묵색 소장방인이 있습니다. 동선사대장은 또「숭 녕만수대장경」이라고도 불리우는바 복건 거산 영천사에서 인쇄신청하여 동선사에서 각판한것으로 우리나라 첫번째의 사각본 대장경입니다. 현재 보관되어 있는 것들로는:


북송원풍3년 (신종, 서기 1080년) 경신간본 법원주림권 제76(경)


원풍8년 (서기 1085년) 을추오월간본 승만사자호일승대방편광경(추)


원우6년 (철종, 서기 1091년) 신말간본보살선계경권 제8(현)


원부3년 (철종, 서기 1100년) 경신11월간본 아비달마대비소사론권 제180 (페)


대관 4년 (휘종, 서기 1110년) 경인간본 불길상덕찬권 상 (환)


정화 2년 (휘종, 서기 1112년) 임진2월간본 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 제9의 10 (밀)과 잔본, 총 14권


이 장경은 우리로 하여금 북송간본 복주판의 진실한 모습과 북송중만기 복건 복주 인쇄업의 발달상황을 요해하게 하였고 또 복주 동선등각원은 당시 우리나라 동남부의 대선림임을 설명해주고 있어 조판인쇄사와 불교사에서 진귀한 자료입니다.


5.「산서통지」


황죽지, 나비장, 책 전체는 30권, 20책으로 나누어 장정하고 판은 방송 각본이고 글씨체는 염체입니다. 책속의 “직관”, “선거”는 만력 임자년 [만력 39년 (1611년)]까지만 기록되였고 이유진이 이를 이어 보충하고 다시 정비한것이 만력산서통지입니다. 이를 이지라고도 부릅니다. 숭진2년 (서기 1629년)에 인쇄에 넘겼습니다. 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숭진2년 하오임천 축휘가 고하도 공서에서 씀”과 “안읍현 지현조린지 교정”이 있습니다. 축휘는 명말 운성의 소금업무를 주관한 관리이고 통지의 서문은 그가 고하도 안읍에서 쓴것입니다. 청나라후의 지서 편전은 모두 이 버전을 매우 중시하여 보관된것이 적어 매우 진귀합니다.


6.「조역광승사 대장경」


1976년 태원시 숭선사 징집. 권축장, 적축, 황표지, 너비 29.5센티미터, 총 21지, 매 판에 27줄, 매 줄에 19자이며 종이 윗부분에 경명, 권수, 장서, 번호를 작은 글씨로 한줄 표기하였는데 이 권의 번호는 “서”입닏. 권수는 광승사가 인제한「석가설법도」로 내용은 인명연리문 14과류소입니다. 이 대장경은 산서성 해주 (오늘의 산서 운성) 천녕사에서 조각된것으로 몽고중통2년 (서기 1261년)의 보충 조작인본입니다.


7. 「북송대반야파라밀다경권」


높이 31.5센티미터, 너비 48.2센티미터. 강황색 장경지, 권축장, 전25지, 권수의 아홉장이 부족합니다. 매 장에 22줄, 매 줄에 14자가 있으며 글씨체는 안체, 묵색이 진하고 행열이 정연하며 권끝부분에 경명 “대반야파라밀다경권 제260”과 조판 년월 “대송개보 5년 (서기 972년)임신세 봉칙 조조”가 찍혀 있으며 밑부분에 “육영인” 소장방묵인이 있는데 북송개보 5년 사천성도에서 조인된것으로 “개보장”이라 약칭하며 우리나라 첫번째의 각본 대장경입니다.


북송초년, 조판인쇄는 사천에서 흥성하였는데 개보4년 (서기 971년) 정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성도에서 5천여권의「개보대장경」을 조각하여 사천의 조판인쇄업이 더욱 흥성세를 이루게 되였습니다. 서적은 매우 정교하고 또 조판이 명랑하고 명쾌한 풍격을 가졌는바 대자판의 글자 크기는 동전만 하고 묵색은 칠과 같았습니다. 송본의 조각인쇄는 매우 정교로와 상당히 높은 감상가치가 있어 후세의 조판인쇄 모범으로 되였습니다. 


8. 「당인서경권」


앞부분이 불완전하고 지질, 오사란이며 해서로 대반야파라밀다경권 제341권을 썼는데 15접지, 매 장에 28줄, 매 줄에 17자이며 끝부분에 “대당영휘3년 5월 6일 엄수경 성선사에서 씀”이라 서명하였고 “성선사” 장방인, 당영위 3년 (서기 652년)이 찍혔습니다.


9. 「우파사계경”잔편」


서기 5세기 북량시기 작품, 지질, 약 20센티미터, 우사란, 자 14줄, 3줄만 완정하고 전 편에서 식별 가능한 글씨는 146자뿐입니다. 정면에는 한자 불경이 씌여 있고 경문 내용은 불교경전「우파사계경」권 6 「시파라밀품 제23」중의 한단락이고 종이 뒷면에는 서역문자가 적혀져 있습니다. 한자는 필력이 힘차고 한간서법의 기질이 보입니다.

 
경권을 쓰는것은 불교가 자신의 교의와 사상을 전파하는 중요한 형식입니다. 새로운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불경의 전포와 유통은 베껴쓰는 형식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런 형식은 서진에서부터 남당까지 지속되였는데 이와 같이 쓴 경권은 종교, 철학, 언어, 문물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높은 사료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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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물문헌

 

청동
一、도철문정(상)


도철문정은 높이가 73㎝, 구경이 47.5㎝입니다. 1990년 평륙현전장에서 출토하었습니다. 용기는 소박하고 거대하며 무늬장식이 깔끔하며 산서에서 출토된 용기중에서 가장 이른 상대의 청동 용기입니다. 정 아래 부분의 담배 그을음 흔적과 출토 지점으로 분석할때 "강에 제사"하는 물품일것으로 추측합니다.


二、효유(상)


효유의 높이는 19.7㎝이고 구경의 제일 넓은 곳은12㎝이고 제일 좁은 곳은 8.6㎝이며 너비는 13.4㎝이고 일종의 주기입니다. 1956년 석루현의 알랑파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효유형은 두마리의 올빼미가 반대면으로 서있고 머리가 뚜껑이고 몸뚱이가 용기이며 눈이 둥글고 부리가 뾰족하여 위무가 위엄합니다. 실용적인 용기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상대 말기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입니다.


三、진후소종(서주)


진후소종의 높이는 25.9㎝이고 선의 간격이 14.9㎝이며 1992년 곡옥현 북조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진후소종은 모두 16개로 그중 14개는 상해박물관이 해외에서 구입하여 소장하였으며 나머지 2개는 진후 묘지의 8호 무덤에서 출토하였습니다. 하나는"년무강, 자자손손"7자가 있고 다른 하나는 "영보자종"4자가 씌여 있습니다. 명문은 모두 참으로 새긴것으로 서주 청동 용기중 최초로 보게 된것입니다. 기록된 전쟁은 사료에 기재 된것으로 서주와 진나라 역사의 연구에 아주 중요합니다.


四、조개인족화(서주)


조개인족화의 높이는 34.6㎝이고 1992년 곡옥현 북조촌 진후묘지의 31호 무덤에서 출토하였고 무덤의 주인은 진선후부인입니다. 이 용기의 조형이 특이하고 구상이 독특합니다. 라체의 사람이 용기를 메고 비조가 두껑을 덮고 용모양의 흐름과 짐승머리의 손잡이, 귀여운 아기곰이 비조를 꼭 쥐고 있는…평면에서 음각에서부터 입체 조각, 기하학에서부터 상생, 선인에 대한 상속이 있고 창조적인 발전도 있으며 절대로 일반 장인이 만들수 있는 공예가 아닙니다.


五、조존(서주)


조존의 높이는 39㎝이고 길이는 30.5㎝이며 너비는 17.5㎝입니다. 1992년 곡옥현 북조촌 진후 묘지 114호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전체적인 조형은 머물러 고개를 돌린 봉조형이고 봉황 꼬리 부분은 코끼리 머리처럼 구부러졌으며 두발과 함께 안정된 3개의 지탱점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조형은 있는 그대로 생동하게 묘사하였고 구상이 독특하고 장식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보기 드문 예술 진품입니다. 용기의 뚜껑과 복부 밑바닥에 "진후작향태실보존옹"이라는 명문이 새겨졌음으로 종묘 제사때의 예기라는 것을 설명할수 있습니다.


六、진후신근호(서주)


진후신근호의 높이는 68.8㎝이고 폭은 35.2㎝입니다. 1992년 곡옥현 부조촌 진후 묘지 8호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모두 두개이고 형태, 무늬, 명문은 거의 같습니다. 조형이 특이하고 웅흔하며 무늬가 화려하고 유창합니다.뚜껑내에 4줄 26자 "유구월초길경오, 진후신근작존호, 용향우문조황고만억영보용"으로 주명되여 있습니다.


七、입조인족통형기(서주)


입조인족통형기 높이는 23.1㎝이고 통의 직경이 9.1㎝입니다. 1993년 곡옥현 북조촌 진후 묘지의 63호 무덤 주인 진목후 두번째 부인의 묘지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형태가 특이하고 청동중 처음 본것입니다. 날개를 치며 서있는 새를 입체 조각으로 손잡이를 만들었습니다. 뚜껑과 구연에 각기 한쌍의 관이가 있습니다. 아래 부분에는 사각 좌석이 있고 사면에 사람모양의 족이 각기 하나씩 있습니다. 사람은 나체이고 상투가 높이 솟았으며 몸을 웅크려서 힘쓰는 상태로 하였습니다. 좌석내에 2개의 방울이 있으나 그의 기능은 진일보의 연구가 필요합니다.


八、월인 우리차 간수(서주)


월인 우리차 간수의 높이는 9.1㎝이고 길이는 13.7㎝이며 너비는 11.3㎝입니다. 문희현 상곽촌에서 출토되었고 화물 6륜차입니다. 차량 좌측에는 왼쪽 발을 월각한 나체 "월인"이 서있고 위에는 들수 있는 뚜껑이 있습니다. 차 전신에는 원숭이, 새, 호랑이 등 동물들이 있고 금수를 양육하고 있는 우리를 상징하고 전차는 회전할수 있는 부분이 15곳이며 구사이 특이하고 제작이 정교하며 보기 드문 작품입니다.


九、동희입인경판(전국)


동희입인경판은 높이가 14.5㎝이고 길이가 18㎝이며 접시의 직경이 14㎝이며 중량이 1.38㎏입니다.1965년 장치시의 분수령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동희는 머리와 귀를 쳐든 신수이고 등에 여자가 서있었으며 묶은 머리가 어깨까지 왔습니다. 두팔은 앞으로 뻗어 원기둥을 잡고 있고 기둥 위에는 회전이 가능한 투각한 구불구불한 독사 모양의 둥근 접시가 있습니다. 이 용기의 조형이 기이하고 매끄럽고 우아하며 무늬 장식이 화려하고 공예가 훌륭하며 중국 청동기의 제작 기술의 탁월한 수준을 구현하였습니다.


十、10.호부온주준(한)


호부온주준의 높이는 24.5㎝이고 구경은 23.4㎝입니다. 1962년 우옥현 대천촌에서 출토하였고 모두 두개이며 형체가 비슷하고 전신을 금으로 도금하였습니다. 뚜껑 중심에는 들어올릴수 있는 고리가 있고 주변에는 3개의 봉황이 있으며 곰발 모양이 다리가 3개 있습니다. 전신은 상하 두층으로 나누는데 동물의 무늬인 호랑이, 양, 낙타, 소, 원숭이, 용, 봉황 등 신비한 동물 10여가지를 부각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북방의 초원 문화 특색이 있을 뿐만아니라 중원의 우아함까지 겸비하였으며 한대 청동 예술과 기술의 모범적인 작품입니다.


석조


1.웅크린 호랑이 입체 조각(한)


웅크린 호랑이의 입체 조각은 높이가 71㎝이고 길이가 134㎝입니다. 1957년 운성시 안시촌에서 채집되였습니다. 통석재로 모양에 따라 조각하는것은 한대 동물 석조의 보편적인 특점이였습니다. 본 웅크려 앉은 석각 호랑이는 소박함 속에 대범이 묻어납니다. 작가는 호랑이의 큰입, 날카로운 이와 예리한 발에 대해 가공하였고 백수의 왕의 용맹한 위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2.석조 초석기둥(북위)


초석기둥의 높이는 165.㎝이고 밑바침대는 32㎝이며 기둥 구멍의 직경은 7㎝입니다. 대동시 석가체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태화8년(기원 484년)사마금용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초석기둥은 위가 둥근모양이고 아래가 네모 모양이며 원형 복분의 조각이 정교롭고 군산 사이에 교룡이 지나가고 활짝핀 연꽃에는 원주 구멍을 조각하였습니다. 구상이 정교하고 영롱합니다.


3.급박을 입힌 채색 석가좌상(북제)


좌상의 높이가 40㎝이고 1954년 태원시 화탑촌에서 출토하였습니다. 석가좌상은 연꽃좌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개를 들고 있고 볼이 풍윤하고 웃음 띤 얼굴이 평온하고 고요하며 즐거워하는 모양이 였고 뒤에 두광을 조각하였습니다. 좌상과 연꽃 좌석은 채색과 금박을 입혔고 가사는 하단을 안으로 넣었으며 쌍구무늬는 좌석까지 내려왔습니다.


4.석가 칠존상(북제)


상의 높이는 46㎝이고 1954년 태원시 화탑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석가상은 연꽃 좌석에 앉아있고 전신에 금박과 적홍채를 입혔습니다. 배모양의 후광 주변은 보탑, 비천을 부각하였고 좌석은 연꽃 모양을 부각하였으며 화생 박생로를 공급하였으며 불단 뒷면의 불상을 채색하였습니다. 전체 불단의 조각 법도가 엄격하고 작식이 휘황찬란하며 헌거롭고 산서 북제에서 제일 정교로운 석가 칠존상입니다.


5.석가두상(북제)


두상의 높이는 33.5㎝이고 1954년 태원시 화탑촌에서 출토하였습니다. 한백옥 부처님 머리, 나발이 높이 솟았고 얼굴의 윤곽이 우아하였습니다. 살짝 감은 두눈, 우뚝 솟은 콧날, 감미로운 얇은 입술과 내성적인 미소지은 입가는 온화하고 점잖으며 귀한 티가 나고 기질이 고결하며 정신이 완비되여 있는 위대한 남편의 이미지였습니다. 정교롭고 뛰어남으로 출토후 줄곧 당대의 걸작이라 오해하였으나 사실은 북제 불교 조상중의 정제품입니다.


6.한백옥 석곽(일부)(수)


삭곽의 높이는 217㎝이고 길이는 295㎝이며 1999년 태원시 왕곽촌에서 개황 12년(기원592년)우홍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우홍은 중아 우국인이고 북제시 入华하였고 북제, 북주와 수에서 직무를 맡았었습니다. 순은 중국과 서양의 장점을 융합하였고 부각 색채가 아주 정교롭고 아름다웠습니다. 내용으로는 주연, 악무, 사냥, 거실, 여행 등 그림이 있고 페르시아의 배화족과 연관이 있는것이 분명합니다. 화면의 인물, 장면, 기구와 초목 등은 모두 선명한 중앙 아시아의 풍정과 예술 수법을 볼수 있었습니다. 고대 비단의 연구의 길과 중화 문화 교류에 중용한 의의를 자기도 있습니다.


7.금박을 입힌 채색화 보살 입상(당)


보살 입상의 높이는 57㎝이고 1954년 태원시 화탑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보살은 "S"형으로 약간 경사지게 원형 좌석에 서있었고 자태가 얌전하고 고왔으며 상반신을 드러냈고 매끄러운 왼쪽 어깨에 견직띠를 걸치고 있었으며 하체의 치마 자락은 가볍고 부드러웠고 윤곽이 유창하고 질감이 뛰어났으으나 아쉽게도 금박과 채색은 거이 모두 탈락하였습니다.


8.열반변상비(당)


비의 높이는 302㎝이고 너비는 97㎝이며 1957년 임의현에서 모집되였습니다. 천수2년(기원591년)제명하였습니다. 전비는 열반 이야기를 위주로 하였고 난타공양, 쌍수열반, 위모설법, 쌍족현성, 송장, 분관과 천계기탑이 있습니다. 아래층에는 시주의 성명을 부각하였고 비신에는 부각이 가득 장식되었고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구도가 치밀하고 조각이 세밀하며 비교적 높은 예술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9.보살 입상(당)


상의 높이는 112㎝이고 태곡현의 백성촌에서 모집되었습니다. 청석 입상은 머리와 팔이 잔간되었으나 근육과 골격의 부각이 아주 정확하였습니다. 신체 조형은 변화가 강한 "S"형을 채용하여 더욱 생동하고 우아합니다. 풍만한 피부와 약간 볼록한 관둔, 유창한 라인은 청춘의 활력과 생명의 질감이 충만하여 성당 불교 예술의 대표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산서문물 도자기


1、 채도관(신석기 시대)


채도관은 문물입니다. 높이는 45.8㎝이고 구경은 35.5㎝이며 밑바닥의 직경은 15.5㎝입니다. 예성현 금성장에서 출토하였습니다. 흙질의 홍도이고 관의 입구가 크며 밖으로 접어 졌으며 복부가 기울어지고 바닥이 평평합니다. 채도관 표면은 검은색의 직선과 곡선이 조합하여 삼각무늬를 이루었고 무늬 장식의 구조는 설계가 교묘하고 선이 간결하고 유창합니다.


2、채색반룡판(신석기 시대)


채색반룡판은 신석기 시대의 문물로 높이가 7㎝이고 구경이 36.5㎝이며 양분현 도사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도자기 판의 내벽은 홍채로 구불구불한 반룡을 묘사하였고 머리는 판구의 변두리에 있고 꼬리는 판의 중앙에 있으며 뱀모양의 기린몸이고 사각머리와 둥근 눈이고 큰입을 벌려 긴 혀를 내밀었으며 신체기 포만하고 밖으로 벌렸으며 평온하고 강건하였습니다.이는 뱀 같기도 하고 악어 같기도 하며 두가지 혹은 두가지 이상의 동물 특징을 한몸에 가진게 분명합니다. 반룡은 가화를 입에 물었고 가화는 아주 튼튼한 벼 이삭입니다. 고대에서 이를 서조를 상징한다 하였습니다. 이 도안은 한 방면에서 도사의 선민이 용에 대한 숭배를 반영하였고 또한방면에서 도사 반룡은 고급적인 대규모의 무덤에서만 존재하는것으로 예기로 사용했을거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3、회도실무늬란복삼족옹(하조)


회도실무늬란복삼족옹은 하조의 문물이고 높이는 72㎝이고 복경은 60㎝이며 1956년 태원시 광사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흙질은 회도이고 전신이 밧줄 무늬이며 또 계란형 항아리라고도 부릅니다. 영원은 앙소 문화의 뾰족한 밑바닥인 병과 허타오 지역의 토착 문화 계란형 항아리입니다. 이 항아리는 착지가 평온하고 통풍과 습기 방지에 유리하여 아주 실용적입니다.


4、호인무용(북제)


호인무용은 북제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25㎝이고 1972년 수양현 가가장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태녕2년(기원562년) 사적회락모에서 발굴되었습니다. 호인 노인 한명이 머리에 적홍색 선형 모자를 쓰고 적홍색 왼쪽 옷깃이 열린 타이트한 긴 적삼과 흰바지에 선형 신을 신고 있었습니다. 높은 코와 깊은 눈, 볼 수염, 얼굴에 온통 주름살이고 얼굴에 웃을을 머금고 있었으며 노래와 춤을 한껏 즐기듯이 활달하고 호방한 성격이 넘쳐 흘렀습니다.


5、백자인수병집호(당)


높이는 31.2㎝이고 구경은 9.8×5㎝이며 복경은 15㎝이고 밑바닥의 직경은 7.7㎝이며 1965년 태원시 석장두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항아리의 손잡이와 구연은 줄기가 있는 연꽃에 형사하고 인수를 장식하였습니다. 중국의 도자기 예술은 페르시아의 금은기를 소조하여 만들었으므로 중국과 서양의 장점을 융합하여 이국 분위기를 부유하고 있습니다.


6、백자 누공훈로(송조)


백자 누공훈로는 송조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11.6㎝이고 구격은 6.1㎝이며 밑바닥의 직경은 4.4㎝이며 1958년 태원시 금승촌에서 출토하었습니다. 로내에 향을 태울시 향연이 모락모락 피여 오르고 누공에서 나오고 있어 실용적이기도 하고 보기도 좋습니다. 태질이 부드럽고 백유가 순백하며 산서의 지방요-개휴요의 제품입니다.


7、백자 갈채 모란무늬합(송조)


백자 갈채 모란무늬합은 송조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3.2㎝이고 구경은 11.7㎝이며 1958년 태원시 금승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자모구 원형 편합, 백유가 누렇습니다. 뚜껑면의 바깥쪽 무늬는 갈색 권초 무늬이고 안쪽에 갈색 국화를 묘사하였으며 소박하고 담백하며 자주요 제품입니다.


8、흑유 녹화 장경병(금대)


흑유 녹화 장경병은 금대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28.5㎝이고 구격은 7.5㎝이며 복경은 16㎝입니다. 1983년 류린현 쉐춘에서 출토되었으며 조형이 전아하고 전신을 흑유를 발랐으며 복부에 철녹색의 풀잎무늬를 묘사하였으며 간결한 필치로 무심코로 보였으나 흥미진진하였습니다. 풀잎이 흑유속에 침투되였고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으며 침착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을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특색을 갖춘 산서의 흑자 장식입니다.


9、이십사효 도기 공예(금대)


이십사효 도기 공예는 금대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10- 28㎝이고 길이가 21-28㎝이며 지산현 마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이십사효의 이야기는 금원시대때 성행하였고 내용의 조합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본 이십사효 도기 공예는 모두 24개로 인물이 생동감 있고 흔히 얻기 어려운 예술 진품입니다.


10、황녹유반룡대로 (명나라)


황녹유 반룡 화로(명대)   황녹유 반룡 화로는 명대의 문물입니다. 높이는 73㎝이고 구경은 53㎝이며 1953년 수집한 정석 화로입니다. 협사도,평염,직경,고복,둥근 밑바닥. 어깨 양측에 장방형의 한쌍의 귀사 있고 귀가 밖으로 기울고 교룡머리모양의 발, 전신을 황녹색유를 바르고 구연과 양귀는 구슬 무늬를 묘사하였습니다.본 화로의 태체가 두껍고 유색이 묵직해보이고 이미지가 장엄합니다.
  

1.옥매(상대)


높이가 10.3㎝이고 너비가 4.3㎝이며 1993년 곡옥현 북조촌에서 출토하였습니다. 진후 묘지 63호 무덤에서 발굴되였고 상대의 유품입니다. 입체조각 입매, 건강하고 힘찬 체형, 기민한 표정. 머리에는 소룡이 있고 입은 크게 벌리고 있으며 매두의 돌기물을 물고 꼬리는 위로 올려 마치 응관 같았으며 선이 능숙하고 유창하며 무늬 장식이 정교합니다.


2.옥인(상대)


높이는 9.7㎝이고 1993년 곡옥현 북조촌에서 출토되었으며 지후 묘지 63호 무덤에서 발굴되였고 상대의 유품입이다. 사람의 형체를 입체 조각으로 만들었고 긴 얼굴과 넓은 턱, 넓은 코와 큰입, 짙은 눈섭과 큰눈. 머리는 뿔모양으로 하였습니다 주먹을 잡고 구부리고 서서 허리쪽에 용모양의 기를 달았으며 네모 신발 아래에 편상 사개가 있어 원래 모 물건에 꼽혀 있었다는 것을 표명합니다. 조형과 차림새로 볼때 모종의 요술이 함의가 있습니다.


3.옥조(상대)


높이는 6.9㎝이고 너비는 3.8㎝이며 1993년 곡옥현 북조촌에서 출토되었으며 지후 묘지 63호 무덤에서 발굴되였고 상대의 유품입이다. 옥의 재질이 투명한 입체 조각 올빼미는 체구가 정면으로 되여 있고 날개가 거이 네모 모양이고 날개를 펴고 샤냥감을 향해 날아가는 자태로 판단됩니다. 조각이 정교하고 상대 옥기 중의 명품입니다.


4.옥조패(서)


최대 황장이 15.8㎝이고 1993년 곡옥현 북조촌에서 출토되었으며 지후 묘지 63호 무덤에서 발굴되였고 황장, 옥형, 옥관, 료주, 마노 등으로 구성되였으며 모두 204개가 있습니다. 최대 황장은 15.8㎝ㅇ고 전체의 옥조패를 펴면 2m에 달하며 무늬 장식은 씽구법을 많이 썻으며 공예가 정교합니다. 아래쪽 옥기러기는 머리를 쳐들고 날개를 펼치고 있으며 생동하고 활발합니다.


5.옥양(서주)


높이는 2.5㎝이고 길이는 5㎝이며 1993년 곡옥현 북조촌의 진후 묘지 63로 무덤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청백옥의 입체 조각이고 양은 웅크리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며 큰 뿌리는 안으로 감아 들었습니다. 조형이 간명하고 생동하며 머리, 등, 꼬리에 튀어나온 척추릉이 있어 장식효과와 서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6.옥사슴(서주)


높이는 8.3㎝이고 너비는 5.9㎝이며 1993년 곡옥현 북조촌의 진후 묘지 63로 무덤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사슴은 고개를 들고 관망하고 있고 막 출발하는 자태이며 눈이 둥글고 귀가 크며 가슴은 펴고 등은 웅크렸으며 진퇴간에 망설이고 있는것처럼 보였고 전체적이 조형이 과장되고 개괄되였으며 사슴의 이미지와 성격 특점을 잘 장악하였고 간련하고 표현력이 강합니다.


7.옥당랑(서)


길이는 7㎝이고 1993년 곡옥현 북조촌의 진후 묘지 63로 무덤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백옥이 편으로 조각되였고 큰당랑과 작은 당랑 두마리가 있으며 큰것이 위에서 작은다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보통"모자강의 깊은 정"이라 생각하지만 "부부의 결별"의 가능성이 더욱 큽니다. 암컷의 자태가 훤칠하고 복부가 크고 꼬리가 넓습니다. 암컷은 몸을 구부려 "죽음에 이렀습니다". 전체적인 형상이 진짜같이 보였고 생동하고 재밋습니다.


8.옥인(서주)


높이가 9.1㎝이고 너비가 3.3㎝이며 1992년 곡옥현 북조촌의 진후 묘지 8로 무덤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얇은 형태와 서있는 자세였으며 전체적으로 억벤 칼질로 음선 윤곽을 조각하였고 눈섭이 진하고 눈이 크여 코가 넓고 입이 납작하였습니다. 옷깃은 세워져 있었고 좌측아래의 소매가 약간 열렸으며 허리를 몪고 아래는 제형으로 되고 중간에는 화살촉 형이 폐슬하며 좌우측의 발꿈치가 이어져 있었고 발끝은 밖으로 들려있었습니다. 옥인의 뒷골에는 생머리가 보였고 머리에는 쌍용 무늬의 장식을 하였으며 두개의 용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고 중간에는 투각하였으며 윗쪽을 굽혀서 천공하였습니다. 이러한 머리 장식품은 보기가 아주 드믐니다.


9.용형 옥패(춘추)


1988년 태원시 금승촌 조경의 무덤에서 출토되었고 전신이 곡무늬로 되었으며 춘추말기의 용무늬의 전형적인 양식입니다.


10.보석묘금완(청조)


높이가 6.9㎝이고 구경이 12.2㎝이며 건륭시기의 작품입니다. 사발밑에 깨진 보성으로 꽃잎이 서로 뒤엉킨 도안을 만들었고 내벽은 석류무늬이며 변두리를 모두 금박을 입혔으며 옥완의 가공이 정교하고 장식 공예가 독특하며 무늬의 장식이 화려합니다.


산서문물 잡항


1.삼릉대첨장치(구석기 시대)


길이는 21㎝이고 너비는 10.5㎝이며 양분현 정촌에서 출토되어 흔히 "정촌 첨장치"라 부르고 10만년전 분하유역 구석기 문화의 재표적인 도구입니다. 형체는 서방 동기의 “손도끼”와 비슷하고 편석을 한 방향으로 가공하여 만들어 진것입이다. 삼릉의 세면은 장엄하게 대칭되고 사용 기능과 예술을 겸비하였습니다.


2.합질 천공 장식품(구석기 시대)


길이가 1.38㎝이고 너비가 1.14㎝이며 두께가 0.24㎝이고 2001년 길현 쓰스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방합 껍질을 부스려서 아이의 면형을 만들었고 한 방향으로 구멍을 뚫어 두 눈을 만들었으며 선을 조각하여 눈섭모양으로 하였습니다. 진주 색채가 작은 얼굴에 빛을 더했고 깊은 눈은 어린아이의 정취가 가득하였으며 요원한 심미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3.후마맹서(춘추)


1965~1966년 산서 후마시 진국 유적지에서 출토되었고 춘추말기에서부터 전국 조기 진 국경어르신이 맹세를 할때의 약신 문서 "재서"라고도 합니다. 문자는 주필로 옥석편 위에 씁니다. 모두 5000여개이고 식별이 가능한것은 650여개입니다. 규형, 원형, 불규칙형이 있고 보통 주홍색으로 쓰고 소수는 흑색으로 씁니다. 그 내용은 종맹류, 위질류, 납시류, 자주류, 복서류로 나누고 이의 발견은 고대 맹세 제도와 진국의 역사 및 고대 문자의 연구에 대해 중대한 의의가 있습니다.


4.목판 칠화(북위)


매 덩이의 길이는 82㎝이고 너비는 20㎝이며 대동시 석가제 사마금용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칠화 병풍이고 모두 5개가 보존이 비교적 완정합니다. 판면에 주칠을 칠하였고「열녀전」의 채색화 입니다. 화풍은 진 고개지입니다. 머리말과 글의 글자체는 예서체와 해서체 사이에 있고 기세가 명랑하고 보기 드문 묵적 입니다. 목판 칠화는 남북조 시기 문화 융합의 산물이고 역사와 예술가치가 아주 높습니다.


5.누예모 벽화(북제)


높이는 160㎝이고 태원시 완곽촌 북제 무평원년(570)누예모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누예모 벽화는 현재 200여 ㎡ 남아있고 기세가 장관하고 기예가 정세하여 북조 회화의 최고 수준을 대표하고「출행도」의 인물이 주와 부를 구분하고 말의 표정이 각기 다르며 동정을 결합하여 현실주의의 풍격이 가득합니다.


6.금에 보석을 박은 반지(북제)


반지 면의 직경이 2.89×2.59㎝이고 테원시 왕가봉톤 무평2년(571)서선수의 무덤에서 출토하었습니다. 두마리의 괴물이 신체가 연결되여 반지를 형성하였고 머리와 버섯모양이 연결되고 반지 면에 파란 보석을 박아 넣었으며 머리에 높은 모자를 쓰고 양손에 각기 장형기를 든 사람을 음조하였으며 동작은 무용을 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전체적인 장식은 화려하고 호화하였으며 중,서아 심지어 더욱 먼 박래품입니다.


7.대반야바라밀다경(송개보5년, 기원972년)


권축장이였고 길이는 745㎝이고 판틀은 32.3×47.5㎝였으며 모두 600원이지만 1권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965년 산서성 능천형 단진화 선생께서 기중한것입니다. 「대반야바라밀다경」권의 260위「소장품을 열다」는 0권, 강황색 장경지, 권축장, 모두 26지, 제1지부터 제10지까지 부족합니다. 제 11지 16번째 줄 , 줄14자, 제26지 12줄, 줄 14자, 기타는 매지 23줄, 줄 14자이고 판틀의 높이는 32.3㎝이고 종이의 길이가 47.5㎝이며 제일 마지막 종이의 길이는 47.5㎝입니다. 권말에 "대반야바라밀다경권 제260"및 "대송개보5년 임신세 봉칙 제조"라고 씌여 있고 아래쪽에는 "루융인"으로 작은 장방형의 묵인이 있습니다. 「대반야바라밀다경권」제260, 북송개보5년 사천 성도에서 조각되었고「고서의 등급 결정 표준」에 의하면 1급 고서로 확정되었고 국가 진귀 고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8.「숭녕만수대장경」 (북송)


석지화 저작, 경첩장, 판형은 0.2×11.2㎝이고 판틀은 24×66.6㎝이며 모두 6434권이나 현재 14권이 보존되여 있습니다. 산서성 박물관「숭녕만수대장경」14권이 소장되여 있습니다. 금자 헤서로 제첨하였고 장경지로 인쇄하였으며 권두에「고산대장」이라고 해서 주문방인이라 날인하였습니다. 판막에 흑색의 작은 장방형으로 날인하였습니다. <숭녕만수대장경> 또는 동선사 대장이라고도 부르는데 복건 고산 융췐을 위해 청인하였으며 동선사에서 판을 조각하고 북송 원풍3년 (기원1080년)에서부터 정화2년(기원1112년)복건 동선사 등에서 간행하였음으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사각한 대장경입니다. 현재 14권이 보존되여 있고「고서의 등급 결정 표준」에 의하면 1급 고서로 확정되였고 국가 진귀 고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9.정우보권50관지폐판(금대)


길이는 33㎝이고 너비는 19㎝이며 1978년 신강현 량촌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지폐면 상방의 50조 돈뀌미 도안은 50관을 표시하고 현재까지 발견된 금대 지폐판중에서 최고로 정교한 지폐판입니다. 기타 지방에서 나온 정우보권"제로통행"과 달리 지폐면에는 "평양태원부 두갈래길 통행"문구로 씌여있습니다. 얻기 어려운 진품입니다.


10.홍무금괴(명조)


길이는 9.4㎝이고 양쪽의 너비는 5.6㎝이며 두께는 2.5㎝이고 중량은 1946g입니다. 1972년 태원시 황릉촌 명릉왕 목릉원내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괴면에는 "로부홍무23년 가을걷이 양식금 50냥5서푼 절수"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금괴의 출토는 과거의 중국 황금은 대괴사 없었다는것을 수정하였습니다.    


문 헌


1.「귀진천문집」


29권, 명대 귀유광 작품, 문인 완집예 교정, 명 만력 4년 옹량유우금당 간본.


책앞에 “귀선생문집 소인”을 첨부하고 서명에는 전서 주문 장방인이 두개 있고 인문은 “쌍감루장서인”, “배덕재진장인” 이고 뒤에는 “만력 3년 10월기 망문생주시 배서”가 있으며 문집목록서명에는 “쌍감루”전서 주문인이 있습니다. 이 본의 종이는 백묵흑이고 행격이 명랑하고 반장에 10줄, 20자, 백구, 단어미, 사주쌍란입니다. 책배 밑의 인판에는 “우금당”이 조각되어 있고 매책권수의 서명에는 모두 장방전서주문인 “쌍감루”가 찍혀있습니다. 권미의 서명에는 삼방전서인이 있고 인문은 1백, 2주로서 차례로 “충막독서”, “배덕재진장인”, “부원숙장서인”입니다. 이런 장서인에서부터 이 문집은 근대의 유명한 장서가, 목록판본학가 부증상의 장서임을 판단할수 있습니다. 매권의 책에는 모두 청대 유명한 장서가 전겸익선생의 붉은필로 권점을 찍어 평어와 주해를 단것이 있습니다. 일부 권에는 붉은 필로 직접 각본에 문자 교정을 하였습니다.


2.「예장선생문집」


책앞에 근대 유명한 장서와 판본목록학가 부증상이 경진하 (1880년) 6월 6일에 쓴 제발이 있습니다. 발중에서는 이 본의 내용과 판각 경력, 판본의 좋고나쁨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발후에는 전서 백문 소방인 “부증상”이 찍혀 있으며 이 본의 반장은 13줄, 23자, 흑구, 단어미, 사주 쌍란입니다. 권수의 서문은 이미 존재하지 않고 앞부분은 예장라 선생의 년보이고 권단 서명후에는 전서 주문인이 있고 인문은 차례로 “배덕재진장인”, “밀암장서”이며 아래에는 “진사 조도진 변차 교정, 후학사란 재교정 각인”이 있습니다. 그다음은 목록으로 총 17권으로 나뉘였고 뒤에는 부증상선생의 일방전서 주문인 “충막독서”가 있습니다. 매권에 서명후 전서 주문인이 있고 인문은 차례로 “쌍감루장서인”, “밀암장서”입니다. 이 장서인감으로부터 이 본은 부증상 “쌍감루”의 장서임을 알수 있습니다. 부증상선생의 제발상 판각의 흐름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부터 이 본은 명나라 가정33년 사란이 다시 교정하여 각인한 본임을 알수 있습니다. 좁은 줄과 가는 글씨, 맑은 글씨체, 아름다운 서묵, 정교한 조루를 보아 원본으로 판단됩니다.


3.「이십일사」


18사 보관, 명만력 24년 내지 34년 북경 국자감각본, 명말 청초 부산선생의 비고주석이 있습니다.


이 판식은 완전히 일치한바 모두 좌우 쌍란, 단어미입니다. 반장에 10줄, 21자, 백구 대자, 행격이 명랑합니다. 글씨체는 방방정정한 방송자로서 단장하고 정중하며 도법이 투철하고 수수하면서 고풍스럽고 조각이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매책 권수의 서명에는 모두 전서 백문인이 있고 인문은 “부산지인”입니다. 매권에 거의 모두 부산선생이 붉은색, 검은색 모필로 권점을 찍어 평어와 주해를 단것이 있습니다. 주해에는 소해서가 있기도 하고 행초서가 있기도 하며 서책의 표지에 있기도 하고 또 책의 윗부분에 있기도 하며 변백 중봉에 있기도 합니다. 그의 주해는 짧은것도 있고 긴것도 있어 한가지 틀에 매어있지 않으며 내용에 대한 개요가 있는가 하면 또 인물 혹은 사상에 대한 평론도 있습니다. 책속에는 각종 부호도 그려져 있습니다. 일부 책장에는 권점을 찍은것이 밀집되어 줄들이 끊임없고 동그라미안에 또 동그라미가 있고 줄밖에 줄이 있습니다. 부산선생은 우리나라 명말 청초의 유명한 서법가입니다. 그의 서법예술은 조예가 매우 깊은바 해서, 초서, 예서, 전서 모두 가능하고 이중에서도 행초서가 가장 유명합니다. 이 본에 부산선생의 권점을 단 평어와 주해가 있기에 이를 통해 부산서법의 예술적 매력을 감상하는것도 매우 진귀합니다.


4.「북송 복주 동선등각원 간본 대장경」


산서성박물관에 14권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장경의 간인은 선후 30여년을 거쳐 주지 혜공대사 충진, 전법 자지지화, 승 계장, 전법 사문 지현, 전법 광혜대사 달과 등 다섯명의 손을 거쳤고 진신, 왕흥, 왕혜, 이의 등 네사람이 인조하였습니다.


이 장경은 모두 군청색 경지피이고 경절본이며 높이 30.2센티미터, 너비 11.2센티미터이며 매 판에 3개, 매 개에 12줄, 매 줄에 17자이며 금자 해서를 쓰고 장경지, 단란, 목각구 또는 염체입니다. 첫장에 “거산대장” 해서 주문방인이 찍혀있고 판 끝부분에 인조자 묵색 소장방인이 있습니다. 동선사대장은 또「숭 녕만수대장경」이라고도 불리우는바 복건 거산 영천사에서 인쇄신청하여 동선사에서 각판한것으로 우리나라 첫번째의 사각본 대장경입니다. 현재 보관되어 있는 것들로는:


북송원풍3년 (신종, 서기 1080년) 경신간본 법원주림권 제76(경)


원풍8년 (서기 1085년) 을추오월간본 승만사자호일승대방편광경(추)


원우6년 (철종, 서기 1091년) 신말간본보살선계경권 제8(현)


원부3년 (철종, 서기 1100년) 경신11월간본 아비달마대비소사론권 제180 (페)


대관 4년 (휘종, 서기 1110년) 경인간본 불길상덕찬권 상 (환)


정화 2년 (휘종, 서기 1112년) 임진2월간본 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 제9의 10 (밀)과 잔본, 총 14권


이 장경은 우리로 하여금 북송간본 복주판의 진실한 모습과 북송중만기 복건 복주 인쇄업의 발달상황을 요해하게 하였고 또 복주 동선등각원은 당시 우리나라 동남부의 대선림임을 설명해주고 있어 조판인쇄사와 불교사에서 진귀한 자료입니다.


5.「산서통지」


황죽지, 나비장, 책 전체는 30권, 20책으로 나누어 장정하고 판은 방송 각본이고 글씨체는 염체입니다. 책속의 “직관”, “선거”는 만력 임자년 [만력 39년 (1611년)]까지만 기록되였고 이유진이 이를 이어 보충하고 다시 정비한것이 만력산서통지입니다. 이를 이지라고도 부릅니다. 숭진2년 (서기 1629년)에 인쇄에 넘겼습니다. 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숭진2년 하오임천 축휘가 고하도 공서에서 씀”과 “안읍현 지현조린지 교정”이 있습니다. 축휘는 명말 운성의 소금업무를 주관한 관리이고 통지의 서문은 그가 고하도 안읍에서 쓴것입니다. 청나라후의 지서 편전은 모두 이 버전을 매우 중시하여 보관된것이 적어 매우 진귀합니다.


6.「조역광승사 대장경」


1976년 태원시 숭선사 징집. 권축장, 적축, 황표지, 너비 29.5센티미터, 총 21지, 매 판에 27줄, 매 줄에 19자이며 종이 윗부분에 경명, 권수, 장서, 번호를 작은 글씨로 한줄 표기하였는데 이 권의 번호는 “서”입닏. 권수는 광승사가 인제한「석가설법도」로 내용은 인명연리문 14과류소입니다. 이 대장경은 산서성 해주 (오늘의 산서 운성) 천녕사에서 조각된것으로 몽고중통2년 (서기 1261년)의 보충 조작인본입니다.


7. 「북송대반야파라밀다경권」


높이 31.5센티미터, 너비 48.2센티미터. 강황색 장경지, 권축장, 전25지, 권수의 아홉장이 부족합니다. 매 장에 22줄, 매 줄에 14자가 있으며 글씨체는 안체, 묵색이 진하고 행열이 정연하며 권끝부분에 경명 “대반야파라밀다경권 제260”과 조판 년월 “대송개보 5년 (서기 972년)임신세 봉칙 조조”가 찍혀 있으며 밑부분에 “육영인” 소장방묵인이 있는데 북송개보 5년 사천성도에서 조인된것으로 “개보장”이라 약칭하며 우리나라 첫번째의 각본 대장경입니다.


북송초년, 조판인쇄는 사천에서 흥성하였는데 개보4년 (서기 971년) 정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성도에서 5천여권의「개보대장경」을 조각하여 사천의 조판인쇄업이 더욱 흥성세를 이루게 되였습니다. 서적은 매우 정교하고 또 조판이 명랑하고 명쾌한 풍격을 가졌는바 대자판의 글자 크기는 동전만 하고 묵색은 칠과 같았습니다. 송본의 조각인쇄는 매우 정교로와 상당히 높은 감상가치가 있어 후세의 조판인쇄 모범으로 되였습니다. 


8. 「당인서경권」


앞부분이 불완전하고 지질, 오사란이며 해서로 대반야파라밀다경권 제341권을 썼는데 15접지, 매 장에 28줄, 매 줄에 17자이며 끝부분에 “대당영휘3년 5월 6일 엄수경 성선사에서 씀”이라 서명하였고 “성선사” 장방인, 당영위 3년 (서기 652년)이 찍혔습니다.


9. 「우파사계경”잔편」


서기 5세기 북량시기 작품, 지질, 약 20센티미터, 우사란, 자 14줄, 3줄만 완정하고 전 편에서 식별 가능한 글씨는 146자뿐입니다. 정면에는 한자 불경이 씌여 있고 경문 내용은 불교경전「우파사계경」권 6 「시파라밀품 제23」중의 한단락이고 종이 뒷면에는 서역문자가 적혀져 있습니다. 한자는 필력이 힘차고 한간서법의 기질이 보입니다.

 
경권을 쓰는것은 불교가 자신의 교의와 사상을 전파하는 중요한 형식입니다. 새로운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불경의 전포와 유통은 베껴쓰는 형식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런 형식은 서진에서부터 남당까지 지속되였는데 이와 같이 쓴 경권은 종교, 철학, 언어, 문물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높은 사료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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